강산도 변한다는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악몽 같은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건물 담벼락마다 빼곡히 적혔던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 반대 구호, 지역 곳곳에 내걸렸던 반대 깃발, 화염병을 들고 고속도로를 점거했던 주민들…. 군수가 정부에 방폐장 유치 신청을 한 2003년 7월부터 철회될 때까지 2년여 동안 전북 부안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주민들은 여전히 ‘방폐장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핵없는 세상, 생명·평화의 부안’. 군청 인근에 서 있는 비석 글귀에서 주민들의 당시 악몽을 읽을 수 있다.

부안 사태는 우리 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비민주 사례로 꼽힌다. 군수가 주민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위도에 방폐장을 유치하려다 화를 불렀기 때문이다. 유혈충돌까지 초래한 격렬한 반대시위 끝에 주민 110여 명이 사법 처리됐을 정도로 고통은 컸다. 주민투표를 통해 군민 91.8%의 반대의사를 확인한 뒤 정부가 위도방폐장 건설 계획을 취소하면서 겨우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방폐장 건설과 관련한 비민주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1990년에는 정부가 충남 태안군 안면도에 주민 몰래 방폐장을 지으려다 부안 같은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태우고 나온 고준위 방폐물(사용후핵연료) 처분장 선정 문제가 조만간 다시 불거질 전망이다. 최근 문재인 정부는 오는 24일 국무회의에서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재개를 확정한 뒤 고준위 방폐장 선정을 위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를 재출범시키겠다고 밝혔다. 앞서 2013년 10월부터 20개월간 관련 공론화위를 운영했지만, 위원 중 3분의 1이 중도에 빠지면서 선정 기준 등 핵심 내용은 논의조차 못했다.

사실, 방폐장 문제는 현대 문명이 지닌 모순의 본질적 요소다. 사람이 몇 시간만 피폭돼도 사망하는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처리할 장소와 방법도 마련하지 못하면서 원전은 펑펑 가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쓰레기 처리장도 없이 쓰레기를 마구 쏟아내는 격이다. 그것도 위해성을 없애려면 30만 년이나 걸리는 치명적인 핵쓰레기를. 게다가 핵무기까지 양산해 서로 위협하고 있으니, 죽음의 문명으로 이룩한 고위험 사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니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의 시민참여단 다수가 밝힌 것처럼 ‘탈(脫)원전’이 문명 전환의 패러다임으로 거론되는 건 당연한 이치라고 해야겠다.

해서, 고준위 방폐장을 선정하는 사회적 합의는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 이는 현대 문명의 폐해에 대한 성찰이자 탈원전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기반이다. 사용후핵연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자 ‘목구멍에 걸린 가시’다. 합의를 더는 미룰 수 없다. 올해 2분기 현재 국내 각 원전의 임시저장시설에 저장된 사용후핵연료의 포화율은 85%에 달한다. 임시저장시설은 2019년(월성원전)부터 2038년(신월성원전)까지 차례로 포화 상태에 도달한다. 그 양이 70여만 다발이나 된다. 그나마 정부가 원전 6기의 건설을 취소하면서 5만1000여 다발 줄어든 게 이렇다.

물론 안면도·부안 사태에서 보듯 고준위 방폐장 선정은 지난한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 신고리5·6호기 공론화위 활동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목격했다. 원전 건설 재개·중단 진영 간의 갈등이 첨예했지만 활동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결실을 맺는 ‘숙의(熟議)민주주의’를 실천하지 않았는가. 앞서 겪은 9차례 실패 사례를 거울 삼아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한다면 고준위 방폐장을 선정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관건은 꾸준한 대화와 토론, 설득 등 소통 노력이다. 이는 숙의민주주의의 요체이기도 하다.

숙의민주주의를 활성화하려면 정부가 먼저 국민에게 신뢰를 심어줘야 한다. 부지 적합성 조사를 비롯한 모든 절차를 과학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은 물론, 그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신뢰가 형성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그러지 못했다. 2005년 원전에서 사용한 부품과 작업복 등 폐기물을 처분하는 중·저준위 방폐장을 선정했던 과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질조사 결과와 달리 정작 경주 방폐장 부지에서 방사성물질 오염 우려를 높이는 지하수가 하루 5000ｔ가량 발생해 안전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폐기물을 보관하는 콘크리트 수직 구조물인 사일로에서 186개의 균열이 확인됐지만, 관리를 맡은 원자력환경공단이 이를 알면서도 보수와 정밀조사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래선 국민에게 신뢰를 줄 수 없고, 곧 재출범할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의 활동 역시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공산이 크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면 그 과정이 진실해야 한다는 건 더 말할 나위가 없는 당위다.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의 활동에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렸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