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 투표를 사흘 앞둔 작년 12월 16일 밤11시 경찰은 막판 선거쟁점이 됐던 국정원 직원의 야당후보 비난댓글에 대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마지막 TV토론을 끝낸 직후의 일이다. 이날 토론회에서 두 후보는 국정원 댓글 의혹과 관련해 치열한 설전을 펼쳤다. 심야에 기습적으로 발표된 수사결과는 "문재인·박근혜 후보에 대한 비방·지지의 게시글이나 댓글을 게재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박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 주말 검찰이 국정원 댓글사건과 관련해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형법상 직권남용 및 공직선거법·경찰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면서 추악한 범죄의 전모가 드러났다. 경찰의 수사가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한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12월 13일 수사를 맡았던 서울 수서경찰서가 국정원 직원의 노트북에 대한 분석을 서울경찰청에 의뢰했다. 조사를 맡은 디지털증거분석실은 14, 15일 국정원 직원이 박 후보를 지지한 게시글과 선거관련 게시글에 대해 찬반 댓글을 올린 것을 찾아냈다.
분석관들이 증거를 발견하고 환호할 때만 해도 이 사건이 정반대로 조작되리라 짐작했겠는가. 하지만 조사상황을 수시로 보고 받던 김 전 청장은 분석실팀에게 증거의 조작을 지시한다. 증거자료에 대한 분석이 끝나기도 전인 15일 저녁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정치관여는 혐의가 없다"는 내용의 보도자료 초안을 작성토록 한 것이다. 16일 새벽 분석실에서 국정원 직원 노트북 분석결과가 조작된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녹화영상에는 조작을 공모한 분석관들이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질까 우려하는 대화도 나온다. 그 뒤 김 전 청장의 지시를 받은 수서서가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고 100쪽이나 되는 분석결과는 폐기된다.
검찰은 "김 전 청장이 특정후보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적당한 시점을 선택해 국정원 개입 의혹을 해소해 주는 내용으로 왜곡된 발표를 시키기로 마음 먹었다"고 밝혔다. 김 전 청장의 행위는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을 넘어 국민들의 주권을 농락한 중대한 범죄다. 김 전 청장이 주도한 범행이든 배후가 있는 범행이든 국민의 헌법적 권리를 짓밟은 국기문란이란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일선 경찰들이 공명선거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일 때 경찰 수뇌가 국가기관의 중대한 선거범죄를 은폐하고 조작한 것은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이 사건의 주역 격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정치적 행각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원 전 원장은 지난 2010년 지방선거부터 선거에 개입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안전을 지켜야 할 본분을 망각한 채 정권의 안보를 위해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원 전 원장은 종북좌파 척결이라는 명분 아래 편협하고도 왜곡된 잣대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정부 정책에 비판적 인사나 집단을 종북으로 내모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일삼았다. 과거 독재정권에서나 있었던 공작정치가 부활한 셈이다. 국정원 댓글과 관련한 검찰 수사결과가 미흡한 점이 많지만, 확인된 국정원과 경찰의 범죄행위만으로도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이다. 안보에 전념해야 할 국가기관이 특정 후보를 위해 선거에 개입하고, 그를 수사한 결과를 경찰이 은폐하고 조작한 범죄행각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이번 검찰 수사결과에 대해 박근혜정부나 새누리당이 보인 태도는 매우 실망스럽다. 새누리당이 중대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원 전 원장을 비호하며 선거법 적용을 재검토하라고 검찰을 겁박하는 태도나 이 사건을 민주당의 매관매직 행위로 호도하는 억지는 가당찮다. 원 전 원장을 싸고도는 것은 공작정치를 용인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박근혜 대통령도 침묵으로 일관할 일만이 아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에 대한 단호한 혁파의지와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의 보장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 국정원 댓글사건의 관련자들을 엄단하고 배후를 밝혀내는 것은 새 정부의 몫이다. 이번 기회에 국정원이나 검경의 오욕스러운 정치 편향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언제 다시 국기문란의 범죄가 재발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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