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 두 시간을 넘어서면서 짜증이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파가 수그러들었다지만 대합실 안은 냉기가 돈다. 난로 주변에 승객들이 둘러 앉았지만 출입구가 열릴 때마다 날선 바람이 달려든다. 설날 오후 의정부시외버스터미널 풍경이다. 어머니가 사는 의정부에서 설을 쇠면서 교통편으로 고속버스를 택했다. KTX를 타면 지하철로 바꿔 타는 게 번거로워 버스를 택했는데 후회막급이다. 지난해 설 귀갓길 역시 낭패를 당했던 기억이 또렷이 살아난다.

오후 4시30분 부산행 고속버스가 출발하는 승차장으로 나섰지만 승객을 태우고 갈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구내방송이 부산행 버스의 출발 지연을 알린다. 고속도로 사정으로 제때 출발하지 못하니 승객들이 양해를 해달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두꺼운 코트 속에 몸을 잔뜩 움츠렸지만 스멀스멀 파고드는 냉기를 떨쳐낼 길이 없다. 안내방송은 전국 각지로 떠나야 할 버스들이 연발된다는 내용을 계속 토해낸다. 하지만 첫 방송 이후 부산행 버스편에 대해선 감감무소식이다.

기약없이 기다려야 하는 승객들의 표정엔 곤혹스러움이 읽힌다. 일부는 분개한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명절날은 으레 그럴 수 있다고 체념하는 모습들이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어렵사리 터미널 2층 구석에 숨어 있는 해당 고속버스 사무실을 찾았다. 잔뜩 부은 얼굴을 들이밀었더니 직원들은 웬일이냐는 듯 심상한 표정이다. 어떻게 단 한 번 지연 출발을 알리고 꿩 구어 먹은 소식이냐고 그들의 무성의를 성토했다. 추위 속에 떨며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언제쯤이나 출발할 수 있는지 해명이라도 해야할 것 아니냐고 따졌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뻔히 예상되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부산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한 차가 의정부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가 오후 4시30분에 손님을 싣고 다시 부산으로 향한다. 평상시에는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운전기사가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설이나 추석 등 명절 때면 사정이 달라진다. 전국 곳곳에서 도로가 막히는데 평소처럼 배차를 한다는 것은 무신경으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비용을 절감하려는 업체의 꼼수가 작용했다. 연휴기간이 이번 설처럼 짧을 경우 설날 아침부터 귀경차량으로 도로가 미어질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추가 차편을 투입하지 않고 부산에서 오는 차를 기다리는 것은 지각출발을 하겠다는 것 아닌가.

지연 출발이 뻔히 예상되는 데도 다른 차편을 투입하는 등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미필적 고의'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부산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한 버스는 오후 7시가 넘어서야 의정부터미널에 도착했고, 부랴부랴 기다리던 손님들을 태워 오후 7시15분에 차머리를 부산으로 향했다. 운전기사가 용변이라도 제대로 해결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사실을 알고나니 출발한다는 안도감 대신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똬리를 튼다. 버스가 자정이나 다 되어 부산터미널에 도착했으니, 그날 기사는 14시간을 쉴 새 없이 핸들에 매달린 셈이다. 최근 들어 우리 교통문화가 선진화됐다고들 한다. 시골 버스정류장에도 화장실이 안방처럼 깨끗하고, 고속버스표는 인터넷으로 예매가 되어 편리해졌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하고 나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아직 우리 사회는 멀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무려 세 시간 가까이 기다려 탄 고속버스는 재벌그룹의 계열사인 K고속에서 운행하는 차다. 평소 소비자를 잘 모시겠다며 서비스정신을 떠들어대는 기업이다. 몇 시간씩 지연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추가 차편을 투입하지 않는 게 그들이 외치던 서비스정신이란 말인가. 승객들의 편의나 안전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횡포에는 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대자본의 오만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에겐 오로지 돈만 벌면 다라는 천박한 장삿속만 가득할 따름이다. 다시는 버스를 타지 않겠다고 별러 보지만 결국 여의치 않아 다시 이용할 수밖에 없는 승객들의 등을 치는 대기업의 처사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런 판에도 철도나 공항, 심지어 상수도 등 공공재를 대자본에 넘겨주지 못해 안달하는 정치권력이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