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는 미국 이론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애칭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그의 일대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오펜하이머’가 요즘 인기다. 그가 원자폭탄 실험을 성공시킨 뉴멕시코주 사막 한가운데 로스앨러모스 캠프에서 기쁨에 들뜬 동료들이 내지르는 “오피”란 함성으로 절정을 이룬다.
1945년 7월 16일 새벽이었다. 사막을 뒤덮은 불기둥과 굉음은 오피에게 원자폭탄 개발의 영광이자 추락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해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일본은 백기를 들었다. 2차 세계대전을 끝낸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의 명성은 매카시즘 광풍 속에 반역자란 낙인이 찍히며 추락한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가 밑바탕이었다.
컴퓨터 그래픽 대신 진짜 폭탄을 터트렸다는 원자폭탄 실험 장면에서 그는 나지막이 읊조린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힌두교 경전을 인용한 이 구절은 굴곡진 그의 인생 뿐만 아니라 핵무기로 핵무기를 막는 현실을 보여주는 장치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 세상을 바꿨듯, 그는 양자역학을 비롯한 300년 물리학의 연구 성과를 집약해 새로운 에너지원이 되기도 하고 대량살상무기가 되기도 하는 핵분열 연쇄반응을 현실화한다. 세상을 구하려다 오히려 세상을 파멸시킬지도 모를 길을 만든 그다.
광복절인 8월 15일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시쳇말로 핫하다. 상영 시간 3시간이 후딱 지나간다고 할 만큼 몰입도가 높다. 21일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18∼20일 77만3000여 명이 즐기면서 관객 수와 점유율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누적 관객 수는 엿새 만에 159만여 명이다.
천재 과학자의 고뇌는 우리 상황과 겹친다. 개봉을 앞두고 선보인 예고편에 붙은 인기 댓글 ‘광복의 아버지 오펜하이머’가 그 예다.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국과 미국 일본 안보협력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대응’을 명분 삼았다. 누가 뭐래도 북한의 위협이 대한민국 최대의 과제다. ‘힘에 의한 우위’든 ‘대화와 타협’이든 대한민국의 안전과 번영이 우선이다. 갈등의 연쇄반응은 뒤끝이 마뜩잖다. 윤 대통령은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를 통해 이런 기조를 재확인했다. 한·미·일 정상회의는 3국 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이나 큰 숙제를 우리가 떠안은 것도 사실이다. 한·미·일 3국 공조 강화는 필연적으로 북한 중국 러시아 3국의 반작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중국 관영매체가 “캠프 데이비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전의 기운이 전 세계를 한기로 몰아넣고 있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오피의 추락을 부채질한 건 수소폭탄이었다. 원자폭탄이 핵분열을 이용한다면, 수소폭탄은 핵융합을 통해 원자폭탄보다 1000배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일본 원폭 피해 참상을 확인한 오피는 수소폭탄 개발 계획을 저지하려 노력한다. 이는 그가 ‘빨갱이’라 불리며 마녀사냥에 내몰리는 빌미가 된다.
오피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자 ‘병 속에 든 전갈’을 예로 든다. 전갈 두 마리를 병 속에 넣어둘 경우 서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조심할 수밖에 없다. 적대적 공생이다. 이런 상태를 유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과 소련이 수소폭탄 개발 경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우호적인 정보 공유를 통해 관리해야 한다는 취지다.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오피는 ‘징징대는 어린애’ 취급을 당한다. 1952년 미국은 수소폭탄 실험에 처음 성공했고, 지금 세상엔 지구를 파멸로 이끌기에 충분한 핵무기가 있다.
오피는 이제 저세상 사람이지만, 스크린에서 되살아난 그는 세상을 향해 힌두교 경전보다 더 강력한 경고를 날린다. “파멸의 연쇄반응이 이미 시작됐다”는 말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오피는 아인슈타인을 만난다. 우리가 아는 그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나눈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오피도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땐 살상력을 최대한 높이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수소폭탄에 반대하고, 파멸의 연쇄반응을 우려하는 건 세상의 파괴자가 갖는 숙명이지 싶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준 대가로 쇠사슬로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벌을 받은 것처럼. 그러니 파멸의 연쇄반응을 끊는 건 핵무기를 이고 사는 우리의 과제다.
정상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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