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운대서 관객과 아티스트 토크
- 앵글과 곡선 등 작업 철학 공개
- 전자기타 음향 시각화도 눈길

‘현대 사진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초현실주의 사진가 랄프 깁슨(Ralph Gibson·84)이 부산을 찾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부산 해운대구)이 선보이는 새 전시 ‘폴리티컬 앱스트랙션(Political Abstraction)’을 기념해 관객과 만나기 위해서다. 지난 3일 열린 아티스트 토크에서 랄프 깁슨은 고령에도 관객의 질문마다 일어서서 답하며 진지한 작업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난 3일 부산 해운대구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에서 사진가 랄프 깁슨이 자신의 영상·음악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최승희 기자

그의 작품은 두 개의 상이한 사진을 나란히 병치하는 ‘딥틱(diptychs)’ 형식으로 제작된다. 왼쪽에는 붉은 커튼 두 개가 보이는 컬러사진을, 오른쪽에는 두 개의 얼굴 조각상이 찍힌 흑백 사진을 놓는 식이다. 앵글과 곡선의 조화, 빛과 어둠의 대조, 형태 또는 패턴의 이중 배치로 두 이미지 간의 관계성을 만들어낸다. 흰 여백을 메우는 상상력은 관객의 몫이다.

아티스트 토크에선 이러한 작업 방식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딥틱 형식의 작업을 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두 장의 사진을 병치했을 때 어떠한 얘기(영향)를 주고받는지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기타를 칠 때 C 코드를 연주하면, 기본음에 더해 ‘오버톤(배음)’이 만들어집니다. 저는 ‘시각적인 오버톤’에 관심이 있어요. 몇 년 전, 저의 관심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니란 걸 깨달았습니다. 그 사진을 봤을 때 주는 영향력에 관심이 있었던거죠. 사진에 보이는(읽히는) 것이, 실제론 사진에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펙터(effector)인 거죠.”

세로 사진 두 장을 사용하는 데 대한 궁금증도 있었다. 그는 “두 눈을 뜨고 보면 세상이 넓게 보이는데, 한쪽 눈을 감으면 (상대적으로) 세로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사진집에 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랄프 깁슨을 자신의 ‘히어로’이자 ‘사진의 아버지’라며 깊은 존경과 넘치는 애정을 보인 관객도 있었다. 30년 넘게 대학 강단에 서다가 최근 퇴임했다는 그는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자신이 다시 사진가의 길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로에 선 자신에게 한 마디를 부탁했다.

작가는 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놔줘서 감사하다”며 짧지만 진지한 한 마디를 건넸다. “삶을 돌이켜 보면 제가 평생 하고 싶었던 건 저의 잠재력을 발현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작가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예술적 정체성’을 강조했다. “젊은 작가는 본인이 존경하는 사진가를 따라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가면 젊은 화가들이 명화 앞에 앉아서 베끼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저는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건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원화가 정말 좋다라는 점만 깨닫게 될 거에요.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적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다’고요.”

이번 전시는 그의 예술적 정체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작업했지만, 사진에선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인지 어떤 정보도 읽을 수 없다. 단순히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재현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대상을 과감하게 클로즈업하거나 명암 대비를 통해 현실을 추상화하고 자신만의 시선을 드러내는 ‘시각적 시그니처’를 보여주고 있다.

이날 아티스트토크에선 그의 또 다른 세계인 ‘음악’ 작업을 선보여 관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그는 직접 촬영한 동영상과 함께 전자기타를 메고 음을 쌓아가면서 새로운 화음을 만드는 연주를 선사해 관객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살아있는 전설’ 랄프 깁슨의 새 전시 ‘폴리티컬 앱스트랙션’은 내년 4월 30일까지 열리며, 입장료는 3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