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란 특정 개인의 모습을 ‘핍진(逼眞)하게’, 즉 아주 비슷하게 재현한 그림 장르로 정의될 수 있다. 서양과 동양에서 화가들은 초상화를 제작할 때 그를 ‘닮게’ 그리려 노력했다. 그뿐 아니라 화가들은 그의 ‘혼(魂, soul)’을 초상화에 반영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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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용신이 그린 ‘이종림 초상(李鍾林 肖像)’ |
화가는 초상화 한 점 그릴 때 주인공이 누구인지 단번에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하게 그려야 했고, 그 인물이 가진 정신이나 인품 등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을 펼쳐야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완성된 초상화는 단순히 그림이 아닌 그 주인공의 ‘대체물’로 인식되었다. 그의 제자나 후손은 사당을 지어 그것을 경건하게 봉안했으며, 때로 그것을 보며 마치 그가 실재(實在)한 듯한 환영(幻影)을 느꼈다.
‘이종림 초상’은 근대기 최고 초상화가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1909년께 대한제국에서 활약한 관료 이종림(李鍾林, 1857~1925)의 53세 때 모습을 그린 초상화다. 그는 한성재판소판사(漢城裁判所判事) 등의 벼슬을 하다 조선의 국권이 일본에 피탈되기 직전인 1907년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이 초상화는 이종림이 영화배우 안성기 씨와 매우 닮은 모습으로 재현됐을 뿐 아니라 그의 얼굴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이목을 끈다.
채용신은 서양 명암법을 명확히 이해한 바탕 위에 붓질을 무수히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종림의 얼굴을 그렸다. 이러한 극도로 사실적인 기법은 조선의 전통적인 초상화법을 계승해 발전시킨 것이었다. 심정진(沈定鎭, 1725-1786)은 “사람의 정신은 곧 외형을 통해 드러나고 외형을 핍진하게 그리면 그의 정신적인 면모도 드러날 것”이란 논리로 초상화를 그릴 때 사실적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선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릴 때 핍진성 구현에 집착한 것은 바로 그렇게 했을 때 대상 인물의 정신적 면모까지 포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종림은 채용신에게서 이 초상화를 받은 뒤 스스로 찬문을 짓고 썼다. “관직이 아경(亞卿·종2품 관직)에 이르렀으니, 포의(布衣)의 지극한 영광이요, 물러나 고향을 지키니 평소의 뜻도 이뤘네. 외형은 어찌하여 말랐으며, 기상은 어찌하여 평온치 못한가! 외진 곳에서 나라 근심하는 마음 그지없구나!(官至亞卿, 布衣極榮, 退守邱壟, 素志亦成, 形何而槁, 氣何不平, 江山半壁, 國憂)” 벼슬길에 나아가 입신양명을 이룬 일과 고향에 은거한 일을 간략히 쓰고 국권 피탈 위기에 놓인 조선의 운명을 걱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더 명확히 이해하도록 할 목적으로 이 글을 썼다.
‘이종림 초상’은 이종림의 모습이 핍진하게 그려진, 또한 그의 내면이 투영된 초상화이다. 우리는 이 초상화를 보며 망국의 기운이 드리웠던 120여 년 전 나라 걱정에 안절부절못한 한 관료와 마주하고 또한 그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