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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51> 마의 산-토마스 만(1875~1955)

죽음·절망이 더 친근했다 … 병들어 1차대전도 못 막은 유럽 고발

  • 서부국 서평가
  •  |   입력 : 2022-10-20 19:17:19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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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보스 호텔식 요양원 그린 작품
- 열패감 환자들 방종·쾌락 추구만

- 정신적 ‘애벌레’였던 20대 청년
- 그곳 7년이 ‘나비’로 바꿔놨지만
- 생사기약 없는 전쟁터 향하게 돼
- 불길 속에 사랑 샘솟는 날 올까?

‘애벌레’였던 20대 청년이 ‘나비’로 변신해 훨훨 날아간다. 하지만 ‘나비’가 내려앉은 곳은 꽃이 아니다. 생사를 기약 못 하는 전장. ‘나비’는 ‘보리수’ 노래를 부르며 쏟아지는 포탄 속을 헤쳐간다. 결말이 급전직하다. 소설 속 공간도 심상찮다. 폐결핵 환자를 치료하는 스위스 다보스 요양원이다. 그곳에선 무슨 일이? 현대 독자마저 궁금해진다. ‘다포스포럼’이 뭔지 아는 이는 또 다른 단어를 얻는다. ‘다보스 베르크호프 요양원’이다.
‘마의 산’에서 ‘폐결핵 국제 요양원’의 모델이 된 스위스 다보스 베르크호텔 샤츠알프. 다보스에서 기차로 수 분 거리다.
소설 서두에 주인공이 등장한다. 조선소 기사로 취직하게 된 23세 독일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 그는 입사를 앞두고 원기를 보충하고, 이 요양소에서 치료 중인 사촌 요아힘 침센을 병문안할 겸 독일 함부르크를 떠나 이곳에 왔다. 요양원에는 5개월 전 입원한 사촌을 포함해 각국 남녀 환자가 모여 산다.

요양원은 해발 1600m 고산지대에 자리 잡아 환자들은 이곳을 ‘이 위’라 부른다. 요양소와 ‘저 아래’ 사회 사이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저 아래’엔 약동하는 삶이, ‘이 위’에는 죽음이 부르는 공포를 숨긴 방종한 삶이 서로 노려보며 생긴 선이다. 이곳에서 환자가 죽으면 그 시신은 날렵한 2인승 경주용 썰매에 실려 ‘저 아래’로 화살같이 내려간다. 허망하면서도 예정된 질주.

■ 다보스와 베르크호프

다보스엔 요양원이 많았다. 1912년 5~6월 저자의 부인 카타리나 프링스하임이 다보스 요양원에 머물렀다. 만은 아내를 병문안하러 들렀다가 진찰도 받았다. 이때 입원을 권유받지만, 소설 주인공과 달리 즉시 속세로 돌아온다. 이 체험이 강렬했다. 상상력이 들끓었다. 만은 이듬해인 1913년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15년에 중단했다가 1차 대전이 끝난 뒤 다시 집필해 1924년 마무리 지었다. 이렇게 12년 만에 완성된 장편소설이 ‘마의 산’이다. 만은 소설 속 폐결핵 국제요양원에 ‘베르크호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요양원은 병든 유럽을 은유한다. 요양원 환자들은 유럽 사회 구성원. 이 고전은 교양(성장)소설이면서 시대소설이라는 분류표를 받아 든 이유가 여기서 설명된다.

요양원은 작은 알레고리(이야기를 은유와 상징으로 엮어가는 수사법)다. 소설 전체가 1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병든 유럽에 경종을 울리는, 거대한 알레고리다.

요양원 원장이자 의사인 베렌스는 환자 수명과 병증을 판결하는 ‘저승 심판관’이다. 만 역시 ‘정신과 의사’다. 저자는 쇠약한 유럽인 정신을 치료하는 ‘처방전’을 소설에 써넣었다. 6장 일곱 번째 장(章)인 ‘눈(雪)’은 눈에 힘을 주고 읽어야 한다. 주제가 응축됐고, ‘마의 산’에 철학 소설이란 이름표를 달아준 장이다.

이 소설은 저자가 가진 양성애에 가까운 성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만을 힘들게 한 이 성향은 한편으론 창작 불길이었다. 성적 탐미주의가 그것인데, 작품을 끌고 가는 동력 중 하나다. 주인공 카스토르프는 동성애와 양성애 경계에 선 청년이지만 정신이 성숙하길 갈구한다.

‘마(魔)의 산(山)’은 독일어로 ‘Der Zauberberg’, 영어권에선 ‘The Magic Mountain’. ‘Zauber’는 마법 또는 야단법석, ‘Berg’는 산을 뜻한다. 이 고급 호텔식 요양원에 카스토르프는 3주 머무를 예정이었다. 와 보니 요양원은 별났다.

도착한 첫날부터 청년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요양원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원장 베렌스에게 아래 눈꺼풀을 뒤집히는 기습 진찰을 당한다. 멀쩡해 보이는 카스토르프, 악성 빈혈이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 카스토르프의 선택

저자가 서재 벽에 걸었던 루트비히 호프만 작 ‘근원’(1913년). 만의 성적 취향에 대한 단서로 여겨지는 그림이다.
부유한 남녀노소 환자가 들고나는 이곳은 색다르다. 카스토르프는 방문객 신분으로 방을 하나 차지한다. 옆방엔 색정광인 러시아 부부 환자가 산다.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럽게 관계를 맺는 그들. 처음 만난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기흉 증상인 휘파람 소리를 내는 여성 환자도 명물. 하지만 그 풍경은 좀 짠하다. 폐결핵이 완치되면 요양소를 얼씨구나 떠나가야 하거늘 꼭 그렇지는 않다. 건강해진 소녀 환자는 퇴원을 거부한다.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건강을 해치려고 찬 호수에 뛰어든다. 왜들 그럴까.

이곳 환자는 삶보다 죽음과 병에 더 친근감을 느낀다. 애써 봤자 결국 자신은 죽는다는 열패감에 절었다. 이곳엔 종교도, 신도 없다. 순간이 중요하다. 안팎으로 퇴폐와 방종이 어느 정도 묵인되는 이유. 그러니 이성보다 감성, 현재 쾌락이 더 중요하다. 중병 환자일수록 존경(?)받는다. 병은 권리이자 신분이다. 소비뿐인 병원 생활에 익숙해진 환자들. 하루 5끼 성찬을 지정석에서 먹고, 눈치껏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 그 사이 병마는 날카로운 발톱을 내밀어 환자를 채 간다. 식당 지정석과 병실 침대가 어느 순간 비었다가 소독된 뒤 다시 새 환자로 채워지는 게 일상. 판박이 생활이니 시간 단위는 일·주가 아니라 달·계절이다. 고산지대라 계절조차 뒤죽박죽, 환자들은 하나같이 괴이쩍다. 마(魔)가 지배하는 공간 같다. 3주간 머물려 했던 카스토르프가 무려 7년을 이 요양원에서 보내게 되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질색할 이곳에 카스토르프는 끌려든다. 체류가 길어지면서 신분이 방문객에서 장기 입원 환자로 바뀐다. 그는 고급 시가인 ‘마리아 만치니’를 피워대며 유유자적 요양원 생활을 즐긴다. 그러면서 숱한 우여곡절을 겪는다. 사촌 침센은 결핵이 완치되지 않았는데도 장교가 되려고 요양원을 떠났다가 병이 도져 재입원한 후 허망하게 병사한다. 카스토르프가 이곳에 머무는 가장 큰 이유는 ‘암고양이’ 같은 러시아 유부녀 쇼샤를 사랑하게 됐기 때문이다. 카스토르프는 사육제 날 밤 쇼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다음 날 요양원을 떠난다. “연필을 돌려주러 오라”고 말하곤 사라졌던 그녀는 돌아온다. 페퍼코른이라는 ‘힘의 화신’ 같은 늙수그레한 거부 남성과 함께.

■ 애벌레와 나비와 전쟁

주제 장이라는 6장을 보자. 장기 입원해 화석이 돼 가는 카스토르프가 대오각성하는 과정이 펼쳐진다. 그는 무료함을 달래려고 스키 타는 법을 익힌다. 요양원을 벗어나 골짜기를 스키로 활강하며 모처럼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다 거센 눈보라를 만나 귀로를 잃고 눈밭에 쓰러져 잠들어 꿈을 꾼다. 병과 죽음에 친밀해진 자신을 반성하고 약동하는 삶을 갈구하는 꿈.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위해 자신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기로 하자.” 미몽에서 깨어난 뒤에도 카스토르프는 한동안 요양원에 머물다 청천벽력 같은 사태를 맞는다.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요양원은 폐쇄되고 그는 전장으로 떠난다.

요양원에 막 도착했을 때 카스토로프는 순진하지만, 정신적으론 미숙한 ‘애벌레’였다. 그 후 7년간 요양원에서 살며 성숙한 ‘나비’로 자라 스스로 날게 된다. 하지만 그가 찾은 곳은 전쟁터. 대단한 역설이다. 마지막 문장을 통해 저자는 묻는다. ‘죽음의 축제와 사악한 불길 속에서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올 것인가?’ 카스토르프가 살아남아 꿈과 사랑을 펼치기를 바라는 독자는 마음속으로 ‘그래야지’라고 소리친다.

‘마의 산’은 활자를 뽑아 올리듯 치열하게 읽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옥에 티 같은 대목을 만난다. 유럽 문인들이 흔히 보이는, 동양을 경시하는 시선이 드러난다. 베르크호프 요양원엔 다양한 외국인이 모여드는바 중국인·남미인 환자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을 묘사한 대목에서 인종을 깔보는 냄새가 솔솔 난다. 중국인 교수 환자는 ‘쥐처럼 눈이 째졌고’ 멕시코인 환자는 ‘꼽추인데다 외국어를 전혀 몰라 대화에 끼지 못해’ 소외된 인물로 그렸다. 당대 유럽에선 인종 차별이 유별났다. 이렇게 보면 이 대목은 ‘옥에 티’가 아니다. 의도된 역설법일 수도 있겠다. 만은 유럽 치부를 고발했던 작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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