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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49> 청구야담(靑邱野談)

재산 불리려 각방 쓴 부부…조선시대의 삶, 지금과 다르지 않네

  • 서부국 서평가
  •  |   입력 : 2022-09-22 19:17:05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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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미상의 조선후기 야담집
- 왕부터 노비까지 다양한 계층
- 정절·입신양면·우정 등 주제로
- 현실-허구 경계서 울리고 웃겨

- 살아 움직이는 옛 이야기로
- 선조의 위기 돌파 지혜 귀띔

조선인들을 웃기고 울린 얘기가 궁금할 때 펴봐야 할 고전이다. 오욕과 칠정을 좇는 다양한 인물과 그들이 엮어내는 세상살이는 오늘날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연하게 세파를 타고 넘는 17, 18세기 선조 서퍼(surfer)들에게 한 수 배워보자.
야담 속 양반과 평민의 삶. 고위 관리로 일하다 퇴직해 안락한 여생을 보내는 조선 사대부를 그린 ‘평생도(平生圖, 사람의 일생)’ 8폭 병풍 일부.
자존심을 먹고 살 수는 없다, 궁하면 통한다. 권 1에 나오는 ‘쇄음낭서백농구우(鎖陰囊西伯弄舊友)’다. 서백은 평안감사. 제목을 풀어보면 ‘음낭에 자물쇠를 채워 친구를 희롱한 평안감사’. 내용은 이렇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두 아이가 선비로 자라 가정을 꾸리게 됐다. 벼슬 운은 엇갈렸다. 한 사람은 평안감사로 떵떵, 다른 선비는 쫄쫄. 혼인을 앞둔 딸에게 혼수 하나 못 해줄 정도로 쪼들렸다. 이 선비, 고민하다 평안감사 친구를 찾아가 손을 벌렸다. 웬걸 환대가 융숭하다. 감영에서 배 두드리며 지내던 선비가 사고를 친다. 감영 맞은 편 여염집에 사는 예쁜 과부를 보고 몸이 달아 불러들였다. 과부는 선비가 몸 수작을 걸자 받아주는 척하다가 음낭에 자물쇠를 채우고 달아나 버렸다. 선비는 평안감사 친구가 자신이 갖고 놀았다며 밤새 발광하다가 날이 새자마자 어기적대며 감영을 몰래 빠져나와 고향 집에 겨우 닿았는데…’. 얘기꾼은 이 대목에서 짐짓 딴청 피운다. 좌중은 “그래서, 그래서” 하며 아우성. 못 이기는 체 얘기를 잇는다. “딸 혼수 마련은커녕 남에게 말도 못 할 망측한 꼴로 집을 들어섰으니 부인을 어찌 보며, 이 난국을 어떻게 풀어야 할꼬.” 그런데, 부인이 활짝 웃으며 선비를 반긴다. 무슨 영문일까.

■ 생생하고 재미있다

조선 시대 화가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점심’은 고된 노동을 하며 함께 모여 앉아 맛있게 밥 먹는 농부 일가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
짧은 줄거리지만 기승전결 서사 구조를 제대로 갖추고 웃음보를 터뜨리게 하는 결말이 돋보이는 야담이다. 이면에는 당대인이 좇았던 욕망과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 시대상이 뚜렷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청탁이 문제다. 조선 시대 고위 관리도 못 벗어났다. 뒤탈 두려워 도움 청하는 손길을 무조건 자른다면 벽창호 아닌가. 평안감사는 유연한 인물. 손 내민 친구가 덜 민망하게끔 일부러 짓궂은 장난을 쳤다.

따뜻한 마음씨를 주제 삼은 길흉화복형 야담이 많다. 하지만 세상이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은혜를 모른 척하는 비정한 인간형도 숱하다. 권 9 ‘무변 윤씨가 의리를 배신했다는 가슴속 이야기’가 그렇다. 세상을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일침. 야담은 근대 문학으로 가는 다리다. 야담집을 번역한 작품 중 버클리대본 한문 ‘청구야담(靑邱野談)’에 가장 많은 290여 얘기가 담겼다. 1833~1864년 편찬됐다고 본다. 첫 편찬자는 미상. 얘기마다 7, 8자 한문 제목이 달렸다. 내용이 아주 다양하고, 분량이 들쑥날쑥한데도 맛깔스럽고 재치 넘치는 제목이다. 내용을 가려 모았다. 야한 얘기는 별로 없다. 주요 수요자가 부녀 계층이어서 그렇게 됐다고 본다.

등장인물은 임금에서 노비까지 당시 사람이 총출동한 듯하다. 조선 후기 시대·생활상이 읽힌다. 유교 가치관이 바탕이되 시대 변화가 스몄다. 가부장·신분제가 흔들리는 가운데 여권 신장과 중상주의가 확연히 보인다. 신분 상승과 몰락은 단골 소재다. 퇴락한 양반을 포함해 의원 장사치 역관 이방 예능인 수공업자 같은 중인계층, 사기꾼 모리배 건달 도적 거지도 생겨났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열심히 일해야 하는 건 기본이겠다. 권 8 ‘부부가 재산을 일구려고 각방을 쓰다’를 보자. 맹자가 말한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생활이 어려우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이 맞다. 재물이 없으면 과거(科擧)를 제대로 볼 수 없고, 집안을 꾸리기 힘겹다. 야담 속 상주 김생 부부는 겨우 결혼한 뒤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 10년 동안 날마다 죽 한 그릇만 먹으며 재산을 모으기 전엔 동침하지 않겠다며 손가락 걸었다. 부부 금실이 좋으면 애가 태어나기 마련인데 지금처럼 가난하다면 흥부 꼴이 될 뿐. 부부는 10년간 죽만 먹으며 묘책을 짜내 재산을 불려 거부가 됐다. 그때야 동침해 자식을 얻으려 했으나 나이가 들어 출산이 어려웠다. 다시 내린 결단은 양자 입양. 같은 성을 가진 남자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바로 상산(商山) 김씨. 이후 이 가문은 후손이 크게 번성하고 대대로 고관대작이 나왔다고 한다.

만날 책만 읽다가 분연히 돈벌이에 뛰어든 얘기, 권 10 ‘허생이 만금을 빌려 장사하다’이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 중 ‘옥갑야화’에 나오는 ‘허생전’과 같은 내용. 이희준 작 ‘계서야담’에도 비슷한 얘기가 실렸다. 조선 시대 야담이 갖춘 문학적 가치가 여기서 확인된다. 한편으론 삶을 돌파하는 방법을 귀띔한다. 정공법 편법 임기응변…. 난관을 해결해 목적한 바를 성취하는 사례가 솔깃하다. 알고 보니 우리 선조, 융통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 인간을 잇고 지혜를 준다

야담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자리 잡았다. 지어낸 냄새는 호기심을 부른다. 현실에 없는 얘기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듣게 되는 게 기담(奇談)이다. 권 3 ‘음분으로 가난한 홀아비가 복을 얻다’. 남정네 욕망이 진하게 배었다. ‘딸린 가족이 없던 홀아비 셋이 각자 표주박 하나씩 차고 산천 유람을 떠났다. 외진 골짜기에서 덜컥 아름다운 과부 셋을 만났으니 말해 무엇하랴. 각자 짝을 지었다. 세 홀아비 중 한 사람이 유난히 장사, 과부와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녀가 기인. 그녀 음부 속엔 양경을 놓아주지 않는 장기가 자리 잡았다. 그것 때문에 그녀와 관계 맺었던 서방 6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 홀아비는 워낙 힘이 세 과부와 잠자리를 무사히 치르고 그 장기까지 뽑아내 보관한다. 나머지 두 과부도 같은 체질. 그녀들을 아내로 맞은 두 홀아비는 약골이었다. 이튿날 두 주검으로 아침을 맞는데…’. 잠자리를 건사한 장사 홀아비가 과연 어떤 복을 받았을까.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 그리스신화에 등장한다. ‘청구야담’도 마찬가지. 권 2 ‘거인도에 간 상인이 겨우 목숨을 건지다’이다. 그리스신화와 야담이 서사가 닮았다. 표류해 섬에 닿았는데 그곳에 사는 식인 거인에 붙잡힌다 →거인이 술 취하자 눈을 찔려 앞을 못 보게 한다 → 가축 틈에 섞여 탈출한다. 신화 설화 전설은 동서고금 가리지 않고 비슷하다. 인류는 같은 줄기에서 나왔으니까.

야담엔 인간만 나오지 않는다. 동물 주인공도 만난다. 권 6 ‘명마가 주인을 찾아 천 리를 달려가다’엔 실제 유명 인물들이 등장해 묘미를 더한다. ‘선조의 딸 정휘 옹주와 결혼한 정창위 유정량(1591~1663)은 준마를 얻어 ‘표중’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귀하게 여겼다. 소문을 들은 광해군이 이 명마를 빼앗아 탔는데 표중이 광해군을 땅에 내동댕이치고 바람같이 달아났다. 이 말이 찾아간 곳은 천 리 떨어진 고부. 정창위가 귀양살이하는 곳이었다. 그는 말을 굴에 숨겨두고 절대로 울지 말라고 타일렀다. 명마는 주인 말을 알아듣곤 조심해 삼엄한 수색에도 잡히지 않았다. 어느 날 조용하던 준마가 길게 울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해 광해군이 실각한 날이었다. 인조는 이 명마에게 품계를 내렸다. 정창위가 세상을 떠나자 표중도 굶어 죽어 동문 밖에 묻혔다’.

국토가 좁고 산이 많은 조선이었다. 풍수지리가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권력’으로 위세를 떨쳤다. 명당을 묏자리나 집터로 제공해 은혜를 갚거나, 노비가 귀인이 되는 일화가 자주 나온다. 기생 후처 같은 지금은 볼 수 없는 계층이 권선징악이라는 가치관과 맞물려 야담을 후끈 달군다. 부녀자 정절, 충효 사상, 우정, 문예, 도술, 무릉도원, 꿈, 혼인, 남녀 사랑, 사주팔자, 입신양명 같은 다양한 주제는 살아 숨 쉬는 조선을 만나게 해준다. 야담에서 허구와 환상을 걷어내면 후기 조선의 민낯이 드러난다. 그 얼굴이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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