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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년…나림 문학과 아나키즘 <3> ‘이사마’ 이병주

사마천 롤모델 삼은 자칭 이사마, 부당한 권력 비판하는 기록자로

  • 조광수 전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
  •  |   입력 : 2022-05-15 18:56:26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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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초반 일본군의 학병 경험
- 평생 자괴감 느끼게한 콤플렉스
- 숱한 작품서 참담한 기억 되풀이

- 궁형 뒤 역작 펴낸 사마천 운명
- 옥고 치른 자신과 비슷하다 여겨
- 27년간 90권 가까운 소설 써내
- 강자보다 약자 옹호했던 지식인

나림이 자유인을 여러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은 건 무엇보다 그 자신이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형용모순 같지만 이병주는 ‘단단한 자유인’이다. 거기에 더해서 자유에 천착한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학병 콤플렉스다.
이병주(왼쪽) 선생이 1963년 12월 16일 부산교도소에서 출소하던 날 어머니 김수조 여사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제공
■40대에 바닥, 본색과 마주하다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굳이 사마천의 ‘발분저서(發憤著書)’나 한유의 ‘불평즉명(不平則鳴)’ 또는 구양수의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이 아니라도 사람은 누구나 더 없는 바닥에 이르면 자신의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할 수 없는 바로 그 바닥에서 자신만의 내공을 찾아 반등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극필반(物極必反)이다.

나림의 경우 그 바닥을 영어(囹圄) 기간에 확인한 듯하다. 마흔의 나이. 조숙하고 탁발했던 나림은 보통 사람이 나이 쉰에야 느낄까 말까 하는 지비(知非)를 이미 그때 느낀 것이 아닌가 싶다.

20대에 교수, 이어 30대에 신문사 주필. 시대 상황이 아무리 중간 세대가 생략된 급격한 세대교체 시기라 해도 결국은 나은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 나은 기회가 주어졌던 것 아니겠는가. 다만, 시대의 요구와 개인의 처지가 기막히게 엮이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을 뿐이다. 삶의 아이러니가 보통 술이 있을 땐 잔이 없고 잔이 있을 땐 술이 없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평생 술과 잔의 결핍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준수한 인생이란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림은 진주·마산 시대를 격하고 부산 시대로 이행한 것이 더 없는 선택인 듯하다. 특히 국제신보의 편집국장 겸 주필로 3년 동안 정력적으로 칼럼과 사설을 쓰며 문명을 날린 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의미가 크다. 정작 스스로는 심히 불성실했음을 자인하고 급기야는 오랜 감방 생활이 당연하다는 자책에 이르지만, 결국은 바닥에 도달한다. 자신의 가장 바탕이 되는 대목 즉 나의 본색을 마주하게 된다. 끝내, 나의 문제인 것이다.

■학병 콤플렉스

김준엽(가운데)과 장준하(오른쪽)가 1945년 8월 국내 진공작전 훈련을 받고 있다. 이들은 학병으로 끌려갔으나 탈출했다. 나남출판 제공
나림에겐 그 문제가 학병 경험이었다. 인생의 가장 예민하던 때이자 가장 가능성이 많았던 때인 20대 초반, 그는 일본군 졸병으로 중국 쑤저우에 주둔한다. 당시 지원 형식의 학병에 약 4500명이 참가했다. 일본과 조선의 대학과 전문학교에 다니던 학생의 80%에 이르는 숫자다. 일부는 징병을 거부해 심산에 숨기도 하고, 상당수는 반강제로 징발되기도 했지만, 이 수치는 참담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중 극히 일부 학병 몇이 일본 군영을 탈출하는 기개를 보일 뿐이었다.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간 ‘돌베개’의 장준하와 ‘장정’의 김준엽이 대표적인 지사들이다. 나림은 징병을 거부해 지리산에 숨은 ‘하준수와 보광당 멤버’처럼 골기 있게 처신하지도 못했고 삼수에 숨어 2년 동안 철학책만 읽으며 지낸 박태열만큼 당당하지도 못했다. 치중대에서 손가락 한 마디를 절단해가며 군마를 모시느라 정신없었을 뿐 탈영해 독립군이 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대목이 평생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하준수와 보광당 멤버’ 이야기가 바로 소설 ‘지리산’이고 박태열 이야기가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이다.

‘관부연락선’ ‘산하’ 같은 장편에선 물론이고 ‘백로선생’ 같은 중편과 ‘8월의 사상’ 같은 단편에 이르기까지 숱한 작품에서 학병 기억을 되풀이한다. 채 피어보기도 전인 20대 초반 너무 일찍 자신을 모독하고 자포자기한 학병 지원을 아파하고 자괴한다. 참으로 큰 상처였나 보다. 자신을 도저히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기도 한다.

■사마천 롤모델 삼아 기록 문학 매진

사마천의 초상. 궁형을 받은 뒤 수염이 없어지고 중성화됐다. 국제신문 DB
나림은 기록자로서의 작가가 되어 기록으로서의 문학을 하기로 한다. 5·16 직후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있던 2개월 반 동안 사마천의 ‘사기’를 완독한 그는 스스로 필명을 이사마라고 한다. 궁형을 당하고 발분저서했던 사마천의 운명이 필화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던 자신과 공감되어 폭풍처럼 발분저서한 것이다. 이후 초인적인 공력으로 27년 동안 90권 가까운 소설을 썼다.

소설은 결국 자기 이야기라는 건 작가도 알고 웬만한 독자도 다 안다. 하지만 10권이고 20권이고 내내 자기 이야기만 할 수는 없다. 나림처럼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라면 더욱이 그렇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나림 소설엔 여러 이름으로 여러 직업으로 등장하지만 결국 자신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 있다. 유태림도 자신이고 성유정도 자신이며 이사마도 자신이다.

나림의 고등학교 제자이자 후배이며 나중엔 국제신보에서 함께 근무했던 변노섭 논설위원이 있었다. 형무소의 같은 방에서 몇 년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나림은 그 시절을 회고하며 “변노섭과 이종석은 대재들이다. 서대문 좁은 방을 아카데미로 만들고 있다”고 칭찬한 바 있다. 그 변노섭이 한 말이다. “유태림도 이병주고, 성유정도 이병주이며, 이사마는 당연히 이병주다.” 이종석은 1992년 부산경실련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부산지역 대표적 시민운동가로 지난 3월 별세했다.

그럼 유태림이나 성유정이나 이사마는 어떤 생각을 가진 인물일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낭만주의 내지는 휴머니즘이다. 그리고 딜레당트다. 사상과 감정의 색깔은 회색이다.

■불편부당한 기록자 자세 견지

기록자로서 소설을 쓴다는 각오로 사마천을 롤 모델로 삼은 나림은 자칭 이사마가 된다. 이사마는 나림 소설의 대표 화자다. 불편부당한 기록자의 자세를 견지한다는 뜻이 우선 크다. 그리고 사마천이 ‘사기’에서 보여준 ‘태사공 후기’를 따라 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유가의 훈도를 받았고 역사 기술도 춘추필법대로 했으나 정작 본인은 도가적 성향을 보였다. 사마천의 그런 심성과 태도를 외유내도(外儒內道)라고 한다. 겉으로는 반듯하고 실재적이고, 안으로는 유연하고 대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외방내원(外方內圓)이라고도 한다. 다소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겉으로는 명사형 인간이고 안으로는 형용사형 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람됨은 도가처럼, 일 처리는 유가처럼 한다면 멋스러울 것이다. 도가가 낭만적이고 여유롭다면, 유가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유연하고 대범하다는 건 괜한 허세나 부리고 얼렁뚱땅 넘어간다는 게 아니라 너그럽고 두량 있다는 뜻이다. 바로 장자의 담백함과 호탕함이다. 실용적이고 구체적이란 건 매사 시시콜콜 따지기만 한다는 게 아니라 성실하고 치열하다는 뜻이다. 바로 공자가 실천해 보인 근사절문(近思切問)이다. 사마천의 처세 그리고 ‘사기’라는 성취가 바로 그 결과다.

이사마도 역사적 사실 부분은 자신의 아픔이나 슬픔을 누르고 건조하게 기술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태사공 후기’에 해당하는 ‘나림 이사마의 후기’로 여기고 썼다. 그 후기가 때론 질펀하고 때론 유머러스하고 때론 감동적이어서 독자들이 읽고 또 읽는 것이다.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료마가 간다’ 등으로 유명한 역사소설가다. 그는 사마천을 흠모했지만 감히 사마란 이름을 차용할 수는 없어 사마천에게는 아득하게 못 미친다는 뜻으로 요원(遼遠)의 요를 써서 ‘사마요’라고 했다고 한다. 나림은 오연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분신을 ‘이사마’라 명명했다.

사마천이든 사마천을 흉내 낸 이사마이든 독재 시대의 지식인은 삶이 고달프다. 우환 의식에 몸은 뜨겁지만 차마 글로 다 풀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지식인의 숙명이다. 큰 지식인은 세상을 문명적 수준에서 살피는 존재다. 문명이란 힘의 시대임에도 애써 강자보다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다. 힘 있는 쪽을 따르는 대신 약한 쪽을 배려하려니 버겁다. 이 대목에서 나림의 자긍심이 빛난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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