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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116> 임성구 시인의 시조집 ‘복사꽃 먹는 오후’

슬픔과 결핍의 응어리… 시조로 세상 끌어안다

  • 박현주 책 칼럼니스트
  •  |   입력 : 2021-10-17 19:34:20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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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부모 잃고 친척 손에 자라
- 가난 탓에 낮에 일하며 밤에 공부
- 94년 현대시조 신인상으로 등단
- ‘논거울’ 가람시조문학상 선정돼
- 과거 어려움 녹여낸 시어 인상적

“늘 행복했다면 제가 글을 썼을까요?” 임성구 시인이 한 말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문인들이 이런 마음일 것이다. 문인들뿐이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결핍 위에서 그것을 조금씩 메우고 쓰다듬으며 살아간다. 결핍이, 슬픔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제목이 동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는데, 임성구 시조집 ‘복사꽃 먹는 오후’에서는 슬픔의 흔적이 느껴졌다. 시인의 마음결에 담긴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임성구 시인을 창원 마산합포구 청량산에서 만났다.
걍님 창원 마산합포구 청량산에서 만난 임성구 시인.
■아프고 슬프지만 단단한 뿌리

임성구 시인은 1967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1994년 ‘현대시조’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조집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살구나무죽비’ ‘앵통하다 봄’ ‘혈색이 돌아왔다’ ‘복사꽃 먹는 오후’ 등이 있으며, 현대시조 100인선 ‘형아’가 있다. 경남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등 시조 관련 상을 다수 수상했다. 현재 경남교육청에 근무하며,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인터뷰 약속을 정할 즈음에, 임성구 시인에게 또 하나의 반가운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시조 ‘논거울’이 제41회 가람시조문학상에 선정됐다. 가람시조문학상은 현대시조의 기틀을 닦은 가람 이병기 선생을 기리고자 마련된 권위 있는 문학상이다.

복사꽃 먹는 오후- 임성구/작가
임성구 시인은 청량산 근처에 살고 있다. 시간이 날 때면, 때로는 시간을 내서 청량산 산책로를 걷는 건 시인의 일상이다. 청량산은 등산로와 임도가 나란히 있어 인근 주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예전에는 버스가 다녔다는데, 지금은 차량이 통제돼있어 마음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산책하기에 정말 좋아요. 벚꽃이 피는 4월에 오면 절경이죠. 오늘쯤 오면 단풍 들기 전 마지막 녹음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얼마 전 비바람에 잎이 많이 떨어져 버렸네요.” 청량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지 못한 시인은 무척 안타까워했다. 시인은 아쉬워했지만, 산책로만 걸어도 좋았다. 산에서 바다로 달려 내려가는 비탈에 선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본격적으로 등산을 하면 마창대교와 마산만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단다.

시조집에서 슬픔을 느꼈다고 했더니 임성구 시인은 “앞에 나온 시집들은 더 해요”라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시를 읽을 때 시인의 사연을 다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시인의 삶을 알면 시가 훨씬 친밀하게 다가온다.

“어머니는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어요. 전 동네 아줌마들의 젖을 먹으면서 살았대요. 아버지와 둘이서 살았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지요.” 어린나이에 홀로 남은 소년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했다. “육촌형수 손에서 자랐어요.” 친척집에서 자랐다니 다행이다 싶은데, 이번에는 육촌형수라는 단어가 낯설다. 그 촌수가 채 가늠도 되지 않는다. “형수도 사정이 어려웠지만, 함께 의지하며 살았지요.” 친구들이 공부만 할 때, 그는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녔다. 힘들었지만, 시간은 강처럼 흘러갔다. 마음속에 쌓여있던 슬픔의 응어리들이 문학이라는 물꼬를 틀 즈음 시조를 만났다. 어쩌면 시조라는 장르가 운명처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이 땅의 사람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던 시가 아닌가.

“처음에는 저도 밝은 분위기의 시조를 쓰고 싶었어요. 그게 잘 안되더군요. 제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래서 쓰고 싶은 대로 썼죠. 시집을 낼수록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아요.” 남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는 삶과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부터 보듬고 만지지 않는다면, 무엇을 쓸 수 있었으랴. 그의 시조에서 느껴지는 감성의 뿌리는 아프고 슬프지만, 단단하다. 그래서 콧날이 시큰해지지만, 마음이 따뜻해진다.

■슬픔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시조

가람시조문학상을 받은 시조 ‘논거울’을 ‘복사꽃 먹는 오후’에서도 만날 수 있다. 1연만 읽어보자. “써레질 해놓은 논이 산 그림자 비추고요/ 밤이면 환한 달빛 야금야금 먹습니다/ 가끔은 하나님의 눈물도 다 받아먹곤 하지요” 필자는 시골마을에서 자란 덕에 모내기 전 물을 댄 논을 본 적이 있어서 이 시조가 더 반가웠다.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이 논 위에 내려앉아 있던 거대한 그림 같았던 풍경을 이 시조로 다시 만났다. 나이가 든 다음에 농사가 ‘인간의 일’에 ‘하늘의 마음’이 더해지는 숭고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논거울을 보았던 어린시절의 추억덕분이다. 그 마음으로 이 시조를 천천히 읽었다.

임성구 시인의 어린시절을 짐작해볼 수 있는 시조 ‘제일 가난한 집’을 펼쳐두고 오래 머물렀다. “그 고장 제일 큰 동네 섬처럼 떠 있는 집/ 마지막 호롱불이 스산하게 흔들리는 창고/ 가난이 퉁퉁 불어터진 허름한 노래가 사네” 3연 중 1연이다. 가난 탓에 전기도 들어오지 못해 동네에서 마지막까지 호롱불을 켰던 집에는 ‘키 작고 눈 큰 아이’가 살았다.

그의 시조는 어쩌면 그 아이가 들려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골목의 오래된 집에 서 있는 오래된 아이. 임성구 시인은 그 아이를 긴 세월 품고 살았을 거다. 열 살 무렵까지의 슬픈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시인뿐이겠는가. 지난 시대 우리 모두 힘들고 가난했다. 세상에 홀로 뚝 떨어진 막막함을 느낀 오래된 아이들이 그 시대를 버텼다. 그 아이를 생각하며 시조집을 두 번째 읽어본다. 콧날이 시큰해지는 건 아주 조금 덜해졌다. 그러자 시조의 제목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시인은 서운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목에 마음이 더 끌린다. 목차 페이지를 펼쳐 제목만 읽었다. ‘풍금을 그리는 밤’ ‘포도나무 이발사의 꿈’ ‘자전거 탄 풍경 속으로’ ‘천년으로 남을 이 하루’ ‘다시, 분이네 살구나무’ ‘능소화가 내 등에 툭!하고 떨어졌네’…. 제목을 읽는 게 아니라, 시조를 읽는 기분이다.

마지막 제목에서 임성구 시인이 세상의 슬픔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쓸쓸하고 추운 것들은 세상에서 꽃 피우면 안 되나’. 쓸쓸하고 추웠기에 꽃이 필 수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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