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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17> 돈키호테- 세르반테스 (1574~1616)

세계 첫 현실주의 소설…방랑 기사, 정의의 사도 꿈꾸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1-04-22 19:20:36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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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5년 전편·1615년 속편 출간
- 폭소·냉소 등 다양한 웃음코드
- 작가 고유의 작법 후대 큰 영향

- 편집증 환자였던 기사 돈키호테
- 모험서 귀향한 뒤 죽는 스토리
- 기사도 정신 허구 깨닫고 꿈 잃어

- 작품 인기에 위작 속편 쏟아져
- 성서 빼고 세계 최다 번역·출간
- 오늘날 문화적 가치 재해석 진행
   
스페인광장 기념탑 중간에 자리 잡은 세르반테스(오른쪽 사진) 동상과 그 아래 설치된 돈키호테와 산초 동상. 저자는 1616년 4월 22일 숨져 다음날 무덤에 묻혔는데 이날은 셰익스피어 사망일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책의 날’이다.
세계에서 첫 근대 소설로 꼽히는 17세기 스페인어 장편소설이다. 원래 서명(書名)은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사진)다. 1605년에 전편, 10년 뒤인 1615년 속편이 출간됐다. 이달고는 스페인 하급 귀족 작위인 이달기아를 가진 사람이란 뜻. 라만차는 소설 속 고향 마을 이름, ‘데(de)’는 ‘~의’란 의미다.

   
이 고전을 앞에 둔 독자는 세르반테스라는 걸출한 작가가 구축한 거대한 문학 세계에서 뭘 찾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첫째는 웃음. 저자가 구사하는 웃음 코드를 이해하면 더 즐겁다. 각색 웃음이 기다린다. 폭소 냉소 미소 실소 쓴웃음에 밴 의미를 맛보는 거다. 웃음은 몸으로 쓰는 언어. 삶을 다른 위치에서 본다. 둘째로 찾아볼 건 글 쓰는 방식. 숱한 후대 작가가 세르반테스식 필법을 찬양했다. 창작 원천은 치열했던 작가 일생. 삶은 문학에 오롯하게 흘러들었고 근대 소설로 들어가는 문이 처음 열렸다. 긴 고생 끝에 성취하고 짧은 안락을 누리다 세상을 떠난 저자 삶을 느껴 보는 건 색다른 인간 탐사이기도 하다.

기사 소설을 탐닉해 그 내용을 현실로 착각하는 편집증을 앓는 방랑(편력) 기사인 돈키호테가 세 번째 모험에서 귀향한 뒤 곧 죽음을 맞이한다는 줄거리. 웃음이 완연하다가 연민이 짙어지는가 하더니 어느새 슬픔으로 변하는 희비극 소설이다. 끝부분에 배치된 이 반전으로 근대 소설 원형이 완성된다. 결말에 여러 의미가 모였다. 돈키호테를 아끼는 고향 주민들은 그를 속여 환향케 하지만 그 결과는 주인공이 의욕을 잃고 죽는 역설로 나타난다. 그는 기사도(騎士道) 허구를 인정하면서 꿈을 잃게 된다. 존재할 의미가 없다는 건 실존의 죽음이라고 세르반테스는 타전한다. 여기서 이 고전은 세계 첫 현실주의 소설이라는 지위를 얻는다. 꿈꾸는 인간은 존귀하다는 성찰이 빛난다.

   
마드리드 스페인광장은 세르반테스 사후 300주기인 1916년 조성됐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는 주로 단어에 웃음을 숨겼다. 돈키호테(Don-Quijote)란 이름. 돈은 남성 이름 앞에 붙는 존칭어, 키호테는 허벅지 안쪽을 보호하는 갑옷 또는 풀 죽지 않는 남근이란 의미다. ‘알론소 키하노’란 50대 이달고는 어느 날 결심한다. “이제 방랑 기사가 돼 세상 약자를 구하고 내 이름을 남기련다.” 마구간에 적토마가 보인다. 남들은 비쩍 말랐다고 하지만. 새로 지은 말 이름은 두 단어(rocin, ante)를 합친 ‘로시난테(Rocinante)’다. ‘예전에는 여위었으나 지금은 무엇보다 뛰어나다’란 뜻. 갑옷 없는 기사는 수프 빠진 라면. 녹슨 증조부 갑옷을 꺼내 보니 얼굴가리개가 없다. 두꺼운 마분지로 1주일 걸려 대용품을 만든 후 튼튼한지 알아보려고 칼로 내리쳤으니, 쯧쯧. 그는 새벽에 홀로 살짝 말 타고 떠나 첫 번째 모험에 나섰지만, 흠씬 두들겨 맞고 이웃집 남자 나귀에 실려 돌아온다. 대실패였지만 되레 당당하다. “방랑 기사에겐 고초가 따르는 법.” 두 번째 출정 땐 첫 실패를 거울삼아 산초 판사라는 동네 농민을 종자로 삼고, 여비와 속옷 같은 여행 필수품도 갖췄다. 껑충하고 얼굴이 긴 주인, 엉덩이뼈가 비치는 로시난테, 당나귀 잿빛을 탄 땅딸보 산초가 야음을 틈타 길을 떠났다. 뚜렷한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들을 가동하는 근대 소설 작법.

‘돈키호테’는 만국 공통어다. 저자가 죽어 묻힌 1616년 4월 23일 사망한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햄릿’처럼. 독자는 돈키호테에게 연민하고 친밀감을 느낀다. 그에게서 자신을 본다. 용감해 보여도 속으론 겁이 많고, 겸손을 강조하지만 조금만 칭찬하면 우쭐한다. 자아에 취해 누가 조롱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실생활에 무용한 온갖 지식에 박식하다. 하지만 도덕심만큼은 아주 선명했으니. 우선, 신분을 차별하지 않았다. 종자 산초도 친구처럼 대했다. 모든 여성을 존중하는 신사. 이런 박애는 동물에까지 미친다. 로시난테를 아끼는 모습이 훈훈하다. 돈키호테는 독신인데 자기 정조를 목숨처럼 지킨다. 정의를 좇는 광기를 가진 이성은 신 중심인 중세를 탈출한 새 인간관. 전편 37, 38장엔 이 소설을 가장 빛내는 미덕인 인문주의가 절정을 보인다. 세르반테스, 참 고달프게 살았는데도 인간을 따뜻하게 품는 작가다. “인문학은 각자 몫을 분배하는 정의를 실현하고, 훌륭한 법을 이해하고 지키게 해야 한다. … 군사력은 인간이 누리는 최대 행복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 최종 목적을 둔다.”

폭소 지점을 보자. 돈키호테 눈에는 성(城)인 객줏집에서 벌어진 대활극이다. 돈키호테, 산초, 객줏집 주인, 마부, 하녀가 원을 그리며 앞 사람만 쥐어팬다. 남녀잠자리가 언급돼 당시 종교재판소가 검열했다. 문자옥이란 중세 잔재다. 다른 장면에서 로시난테도 웃긴다. 명색이 수컷이라고 풀 뜯는 암말을 덮치다가 실패한다. 화가 난 마부들이 돈키호테와 종자 산초 판사를 매타작했다. 이때 산초가 탄식한다. “로시난테가 그런 놈인 줄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요. 이 세상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맞네요.” 익살스럽기는 산초도 도긴개긴. 돈키호테에게 월급과 대가를 요구하는 현실주의자지만, 몽둥이찜질을 당하면 고약을 찾는다. 같이 맞은 돈키호테는 쓰라린 마음을 달래줄 명언을 떠올린다. 둘은 점점 닮아간다. 주인은 말할 때 속담을 더 사용하고, 종자는 남이 잘못 말한 단어를 꼬치꼬치 바로잡는다. 광기는 주인에게서 종자로 이동한다.

돈키호테 행색이 변해간다. 쇠 창은 막대기 창으로 바뀌었다. 얼굴 투구가 박살 나자 이발사 놋대야를 맘브리노 황금 투구라며 빼앗았다. 날아든 돌에 맞아 어금니가 빠져 ‘슬픈 몰골의 기사’가 됐다. 얘기 전개도 돈키호테를 닮아간다. 앞뒤가 맞지 않는 서사가 흔하다. 산초가 타고 다니던 노새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뒤에 가서야 강탈당했다고 어물쩍 처리하고, 갑자기 돈키호테 칼이 도둑맞았다고 서술한다. 작가 실수와 세르반테스가 개발한 글쓰기 기법이 뒤섞였다. 책 속에 14행 연시인 소네트가 자주 나오는데 그 실력은 별로라는 평. 무관한 얘기를 끌어 붙이는 액자 소설 작법도 선보였다. 상사병으로 죽은 목동 얘기 같은 남녀 연애담, 전편 33~35장에 나오는 ‘당치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작가는 분량 늘리기로 오해 마시라고 눙쳤다.

1614년 저자는 속편 59장을 쓰는 중이었는데 아베야네다란 정체 모를 작가가 위작 속편을 냈다. 다음 해 세르반테스는 후속작을 발표했다. 전편 책 이름 중 ‘이달고’만 ‘기사’로 바뀌었다. 이달고 돈키호테가 객줏집 주인에게 엉터리지만 기사 서품을 받았다면서. 속편(전체 74장)은 엘 토보소를 향해 출발하는 장면으로 막이 오른다.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돈키호테가 연모하는 그녀인 둘시네아 공주(농부 딸)를 알현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속편 속에서 돈키호테는 명성이 한결 높아졌다고 자화자찬한다. 출간된 전편을 통해 이름이 꽤 알려졌다는 기발한 설정을 했다. 위작이 나왔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해당 작가를 비웃기도 한다. 후속작에서도 익살과 모험이 이어지지만, 전체 분위기는 전편보다 진지하다. 쓸모없다는 방랑 기사를 돈키호테는 이렇게 평한다. “생각은 순결해야 하고, 말은 정직해야 하며, 행동은 관대하게, 사건에서는 용감하고, 역경에서는 인내를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겐 자비를 베풀고, 목숨을 잃더라도 진리를 지키고 지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속편 18장)

   
‘돈키호테’는 각국에서 성서 다음으로 많이 번역·출간됐다. 후대 소설은 모두 ‘돈키호테’ 아류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스페인을 무대로 한 이 소설은 지금도 그 가치가 재해석되는 중이다.

서평가·세상관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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