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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전다형의 시 둘레길 <1> 회동수원지, 나의 ‘오륜호수’

자연과 마주한 ‘관조의 시간’… 내면의 호수가 맑아졌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1-04-15 19:03:17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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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 내 머리부터 가슴까지
- 멀고 먼 내면 여행을 떠났다

- 흩날리며 퇴장하는 벚꽃 보며
- 아름다운 소멸을 생각하고
- 깊어지는 호수의 수심은
- 우울감을 묽어지게 만들었다

- 시인은 백 년 겨우 살지만
- 詩는 영원히 살아 숨쉰다

코로나는 어디론가 떠나려는 인간 본성을 억압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탈주를 꿈꾼다. 마음만 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었던 세계일주의 발길이 묶였다. 떠날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 커질 무렵, 세계일주에 앞서 내면의 일주를 권한 철학자 디드로의 문장을 떠올렸다. 내면의 일주는 자신을 관조할 시간을 준다. 비행기 타고 해외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바꾸면 당장 떠날 수 있다. 항상 바깥세상을 궁금해했을 뿐, 정작 내면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참(眞) 나는 모르고 살았다. 내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코로나가 가져다준 관조의 시간, “머리부터 가슴까지 가장 먼 여행”을 떠났다.
   
‘오륜호수’ 둘레길 의자에 앉아 사람들이 쉬며 이야기한다. 부산 금정구 회동수원지를 자주 찾는 사람들은 이 저수지의 일부를 오륜호수라고 부른다 한다. 산과 호수가 만나 평화와 편안을 주는 ‘내면 여행’ 명소다.
■ 맨발로 땅뫼산 황톳길 걷다

봄비 내리던 어느 날, 부산 금정구 회동수원지로 갔다. 회동수원지 품에 안긴 오륜본동 일대 호수를 사람들은 흔히 ‘오륜호수’로 부른다. 이 표현에서 ‘월든호수’ 물 내음이 난다. 나는 일년 열두 달 중 절반 이상 오륜호수에 간다. 오륜호수는 내게 건강관리센터이고 힐링 공간이며 시의 원천이다. 혼자 많은 생각을 거느리고 나선 우중 산책길, 비바람이 벚꽃 향기를 헤프게 휘저었다. 꽃잎의 춤사위가 허공을 맴돌았다. 봄춤을 다 춘 벚꽃이 지고, 제 배역을 연기한 배우가 퇴장하는 아름다운 소멸에 대해, 삶을 떠받치는 꽃받침에 대해, 관객 동원에 실패한 봄 무사에 대해, 꽃의 처지가 되어 보았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은 있다 /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 흙의 일이므로 /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 겸허하게 농사라 불렀다…”( 문정희 시인의 ‘흙’·일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길’, 꽃잎이 거룩한 거름으로 돌아가는 시간, 연두는 초록으로, 꽃은 피었다 지고, 꽃 진 자리 열매 맺고, 낙엽 지고 나목이 된 나무는 모든 어린 연두에 눈길을 보낸다. 나는 나를 낳은 태반을 만나러 맨발로 황톳길을 걸었다. 비가 흙냄새를 코끝까지 끌어올려 준 까닭이다. 비가 내려 미끄러웠고 발이 시렸다. 그러나 싫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장아장 걷는 나를 앞세우고 고추 모종을 머리에 인 채 남새밭으로 갔다. 나는 밭고랑 끝에서 고추 모종을 심던 어머니의 굽은 등이 소실점 너머로 사라질 때쯤, 이러다 정말 어머니가 사라지면 어쩌나 싶어 무서워 운 적이 있다. 그런 나를 아버지는 목말 태워 동네 한 바퀴 돌아주셨다. 그 기억이 내 첫 여행이다. 두 번째 여행은 조금 더 먼 들판까지였다. 아버지 자전거 살대에 앉아 물꼬를 보러 간 때였다. 그때 따뜻한 추억여행길은 시린 맨발을 잊게 했다. 따뜻한 생각을 신고 다녀온 고향길,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장 먼 길을 돌아서 왔다.

   
부엉산 정상에서 만난 회동수원지 전경. 절경이다.
■ 편백 숲속, 소로를 만나다

“시 한 줄을 장식하는 것이 / 나의 꿈은 아니다. / 내가 월든 호수에 사는 것보다 /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 / 나는 나의 호수의 돌 깔린 기슭이며 / 그 위를 스쳐 가는 산들바람이다. / 내 손바닥에는 / 호수의 물과 모래가 담겨 있으며, /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은 / 내 생각 드높은 곳에 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



자연 속 편백나무는 스스로 수관기피(樹冠忌避)를 지키며 산다. 수관기피는 ‘나무의 줄기·잎이 뚜렷한 영역·경계선 안에서만 성장하는 현상’으로 일부 수종에서 관찰된다. 나는 편백 숲 벤치에 앉아 오륜호수에 빠져들었다. 200년 전 월든 호수에 살았던 소로를 만났다. 그는 ‘월든 호수에서 사는 것이 신과 천국에 가장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관조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수 수심이 깊어졌다. 내 내면을 비춘 물빛이 조금 맑아졌다. 굵어지는 빗방울이 수면에 동심원을 그렸다. 바람이 동심원을 호수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내 우울은 묽어졌다.

■ ‘죽편’ 암송한 대나무 숲길

“여기서부터, --- 멀다 // 칸칸마다 밤이 깊은 // 푸른 기차를 타고 //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 백 년이 걸린다” 서정춘 시인 시집 ‘죽편(竹篇) 1-여행’ 중· 전문

부엉산 전망대 가는 대나무 숲길 한가운데, 아름드리 물푸레 노거수가 있다. 수많은 대나무의 이목을 한 몸에 받는 노거수는 젊어 보였다. 나는 노거수에게 시 ‘죽편’을 읽어주었다. 곁에 선 대나무가 슬그머니 제 속에서 피리 소금 대금을 꺼내놓았다. 대나무 속 마디는 악기가 될 수 있다.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것은 죽음마저 초월한다. 백 년 만에 핀 대꽃은 시인의 시혼에 씌운 월계관이다. 짧은 시 ‘죽편’은 우리네 한평생을 말한다. 대나무가 다 죽비로 보였다.

■ 부엉산에서 ‘장전구곡가’

오륜대 부엉산은 175m 야트막한 산이다. 그러나 수직 계단은 쉽게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련하지 않은 내 저질 체력 탓이기도 했다. 오르막은 가팔랐다. 눈앞에 정상을 두고 숨이 턱턱 막혔다. 누군가 먼저 올라간 이 길의 8부 능선에서 시시포스를 생각했다. 내 능력 밖을 넘본 죄를 평생 갚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껏 밀어 올려도 도로 제자리로 오는 바윗덩어리를 어깨에 맨 가여운 내가 ‘꽃들에게 희망을’(트리나 폴러스 지음)에 나오는 호랑애벌레 아닐까? 땀·눈물이 범벅 된 눈앞에 정상이 나타났다. 천천히 황령산과 금정산 그리고 천성산과 아홉산이 눈에 들어왔다.



“오륜대하취곤령(五倫坮下翠坤靈) / 양곡류파만고청(兩谷琉波萬古淸) / 재도명암산일모(纔到鳴巖山日暮) / 이성초적양삼성(耳醒樵笛兩三聲)”

오륜대 솟아난 누리 정기 모인 곳 / 두 골짝 어우러진 물 예나 제나 푸르구나 / 울바우 가뭇한 산머리로 해는 저무는데 / 아련히 들려오는 초동들의 피리소리여.(추파 오기영의 한시 장전구곡가‘·부분)



   
구한말 오륜대에서 홍류동천까지 노래한 추파 오기영 선생의 ‘장전구곡가’ 한 대목이다. 이 아름다운 서정시를 쓴 시인은 갔으나, 시는 영원히 산다. 나도 내 고향 537번지 감꽃나무 아래서 화답 시 한 수 쓸까? 예술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다만 진화할 뿐이다. 인간은 백 년을 겨우 살다 가면서 뭘 남겨놓고 가야 하나, 이 시가 내게 물었다. 반백 년 넘게 산 나는 한치 앞을 모른다. 부엉산 정상에서 부엉부엉 미네르바를 애타게 불렀다. 메아리조차 없다. 유명한 시 구절처럼 올라갈 때 보이지 않은 것이 내려올 때 보일까? 눈을 낮추고 걸었다. 하산 길 동행을 자청한 각시붓꽃이 집까지 따라왔다.

시민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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