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악행은 소수의 악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는 이 개념을 제안한 사람은 20세기 최고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1906~1975)다.

독일 태생 유대인 사상가인 아렌트는 1,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직접 겪은 뒤 전체주의를 탁월하게 분석한 ‘전체주의의 기원’을 펴냈다. 이를 통해 사상가로 주목받은 그는 1963년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묘사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고안해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에도 수많은 저서를 통해 폭력과 악의 본질,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광포한 시대 속에서도 공공성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아렌트의 사상은 날이 갈수록 가치와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난민, 인종차별, 극우주의 문제 등을 겪고 있는 불안한 현대인에게 소중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정농단 사태가 일어난 배경을 따져보는 과정에서 ‘악의 평범성’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아렌트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지만 내용의 깊이 때문에 선뜻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그래픽 노블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은 아렌트 입문서로 제격이라 할 수 있다.

책은 아렌트의 생애와 사상을 함축적이고 밀도 있게 담았다. 전반부에는 칸트를 동경했던 유년기,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평생의 스승이자 연인인 하이데거를 만나게 된 이야기, 나치를 피해 도망쳤던 두 번의 탈출 등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후반부에는 그의 사상이 궤도에 오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아렌트가 제시한 ‘행위’ ‘복수성’ ‘탄생성’ ‘공적영역’ 등과 같은 20세기 인문학과 정치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개념의 의미와 탄생 배경이 등장해 독자의 지적 욕구를 채워준다. 벤야민, 아인슈타인, 장 뤽 고다르 등 같은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과 아렌트와의 만남도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김민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