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동료 신부 중에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분이 있다. 하루는 부산가톨릭시각장애인선교회에서 사목하는 이 신부가 부산가톨릭평화방송 ‘사랑이 있는 세상’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아나운서가 시력을 잃은 후 무엇이 달라졌는지 물었다. 그분은 사목자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변화되었다고 하였다. 즉, 볼 수 있을 때에는 신자들을 어떤 목적지를 향해 이끌고 가려는 지도자의 마음으로 사목했는데,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인들과 같은 입장이 되니 자연스럽게 신자들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고 이들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마음으로 사목하게 되었다고 했다.

벨기에에서 한국으로 와 지역민들과 함께 ‘임실 치즈’ 사업을 일군 지정환 신부. 국제신문DB

그때 저는 책으로만 배웠던,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사랑이 사목 현장에서 이렇게 실현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신부와 같은 사목자가 가져야 할 참된 영성은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 속으로 녹아 들어가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가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한국전쟁 이후 고통받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사랑했던 벨기에 신부가 있다. 바로 지정환 (벨기에 이름 디디에 세스테벤스) 신부인데, 이 신부가 우리나라를 알게 된 것은 1950년 19살 되던 때 어느 벨기에 브뤼셀 극장에서 보았던 뉴스 때문이다.

지정환 신부는 이 뉴스에서 일본 식민 지배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죽어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았다. 그 이후부터 이 청년은 참혹한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였고 그로부터 9년이 지난 후 신부가 되어 우리나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 신부는 처음 전주교구 부안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던 지정환 신부는 자신이 돌보는 신자들은 주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인데, 농사를 지을 땅이 없는 현실에 마음 아팠다. 그래서 이 신부는 지역민들과 함께 버려져 있던 땅을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개간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참여했던 가구마다 1정보 (약 3000평)의 땅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또한 산악 지역에 있는 임실성당에서는 고추나 고구마 같은 작물을 재배하며 가난하게 살던 지역민들과 함께 산양 목축을 시작했고 이후 한국 최초의 치즈 생산에 성공하여 이들이 살아갈 기초를 놓았다.

물론 시련의 시기도 있었다. 노름빚을 갚느라 어렵게 개간한 땅을 팔고 떠나버린 사람들도 있었고, 치즈 생산 방법을 배우러 유럽으로 간 사이 산양 목축을 포기하고 떠나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정환 신부는 어려움이 닥쳐올 때마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냈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이후 다발성신경경화증으로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자신과 같이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장애인들 사이로 들어가 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도록 용기를 주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참된 사목자의 영성은 인간이 되어, 그 시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던 이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자비하신 하느님을 전하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부들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봉사자들이 부산가톨릭시각장애인선교회 지도신부와 지정환 신부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과 같이 희망을 향해 나아가길 바란다.

cpbc 부산가톨릭평화방송 총괄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