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소 대결 뜨겁던 냉전시대
- NASA 우주개발에 큰 공 세운
- 3명의 흑인 여성 과학자 이야기

- 백인과 화장실 따로 쓰는 등
- 당시 극심한 인종차별 상황서
- 부조리한 현실에 당당히 도전

- 역사 이면에 가려졌던 주인공들
- 미국 중심부 변화 이끈 위인 표상

대만 태생 영화감독 이안의 영화 '와호장룡'은 한자가 '臥虎藏龍'입니다. 직역하면 '웅크린 호랑이, 숨어있는 용'. 영어 제목은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입니다. 그 가운데 '장(藏)'에 해당하는 'Hidden(가려진, 숨겨진)'은 데오도르 멜파 감독의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에도 있습니다. 'figures'는 '위인(偉人)들'과 '숫자들'입니다.

그림=헌즈 작가

먼저 '가려진 위인들'의 소개부터. 영화가 시작되면 교통경찰관이 도로에 퍼져있는 승용차에 다가갑니다. 함께 탄 흑인 여성 세 명의 신원을 조회하던 경관은 놀라워합니다. 그들이 NASA(미국항공우주국) 출입증을 내민 것. 경관이 호기롭게 말합니다. "미국이 우주 개발 경쟁에서 소련을 앞설 수 있게 힘써주세요." '백인' 경관은 그들의 차를 나사 정문까지 호위해줍니다.

도로시 본은 전산 실력이, 캐서린 존슨은 수학 실력이, 메리 잭슨은 공학 실력이 뛰어납니다. 어려서부터 영재 소리 들으며 큰 삼총사이고요. 영어로 영재 교육은 'Gifted and Talented Education'입니다. 'gift'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선천적 재능이고 'talent'는 스스로 키우는 후천적 재능입니다. 네 단어의 첫 글자를 연결하면 'GATE(문)'입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은 향후 10년 안에 달에 갈 것이다'라고 천명한 이후 이들 삼총사가 우주로의 도약을 향한 관문(gate)을 열어젖힌 실화 이야기가 '히든 피겨스'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을 들여다봐야 하겠습니다.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하면 건물의 나머지 유리창까지 파손될 거며, 건물이 있는 곳이 결국 우범 지대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의 범죄학 학설이지요. 중요한 건 이 이론이 이제는 전(全)방위적 분야와 영역에서 조명 받고 있다는 점이지요.

'히든 피겨스'의 세계에도 '깨진 유리창'이 존재합니다. 성 차별과 편 가르기 문화입니다. 때는 1960년대 초. 노예제가 폐지된 후 백여 년이 흘렀는데도 흑인은 백인 화장실을 쓸 수 없고, 버스에서 흑인은 맨 뒷좌석에만 앉아야 했고, 백인식당은 흑인에게 음식 서빙을 거부했으며, 법원이 흑인 학생의 입학을 명령하면 학교가 자진 폐교해 학생을 받지 않던 때에 영화는 흑인 여성 인재들이 나사에서 어떻게 차별받았고, 그들의 존재가 왜 가려져야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번엔 '숨은 숫자'에 관하여. 맏언니 도로시는 흑인 여성 전산실 리더입니다. IBM 컴퓨터실이 처음 나사에 생겼을 때 큰 공을 세웁니다. IBM에서 온 컴퓨터 전문가들조차도 쩔쩔맬 때 그녀가 오래전부터 독학으로 쌓은 실력을 뽐내며 입력값을 뽑아내자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수학 천재 캐서린은 명문대 출신 백인 천재들조차 고개를 젓는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 우주선 발사에 필요한 숫자를 내놓습니다. 나사가 유인 우주선 발사 실험을 할 땐 착륙지점 좌표의 오차를 바로잡아 실험을 성공시킵니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들.

한편 메리는 나사 바깥에서도 투쟁합니다. 흑인 최초의 나사 엔지니어를 꿈꾸는 그녀는 흑인이 백인과는 수업을 들을 수 없던 때에 백인 판사를 논리정연하게 설득해 수강 허락을 받아냅니다. 그 장면은 그녀의 창의적 도전 정신을 잘 보여주는 통쾌한 대목입니다. 한때 그녀가 친구들에게 했던 말 속에 뼈가 들어있음을 내비치는 대목이어서 통쾌합니다. "우리가 앞서갈 기회가 생기면 백인들은 꼭 결승선을 옮긴다니까."

제가 꼽는 '결정적 한 장면'은 화장실 장면입니다. 볼일이 급할 때마다 수백 m 떨어진 흑인용 화장실에 달려가야 하는 일이 계속되자 본부장이 캐서린에게 따져 묻습니다. "왜 근무 시간에 자꾸만 자리를 비우는 거요?" 캐서린은 당차게 대답합니다. "800m 거리라는 거 알고 계셨어요? 볼일 보려면 그 먼 거리를 뛰어야 한다고요." 본부장은 모든 흑인 여성들이 보는 앞에서 대(大)못을 뽑는 공구인 '노루발 못뽑이'로 '흑인용(COLORED)' 표지판을 박살 냅니다. '깨진 유리창 문화'를 개선하려는 의지이지요.

본부장의 호소가 뒤따릅니다. "나사에서 우리는 다 똑같은 색깔 오줌을 눕니다.(Here at NASA we all pee the same color)" 그 말을 세 단어 문장으로 바꾸면 'We are united(우리는 하나다)'입니다. 우주 개발 경쟁에서 미국이 소련에 뒤쳐지게 하는 요인들 중 하나가 인종차별임을 본부장도 인정한 것이지요.

미국용 포스터의 광고 문구를 소개합니다. '당신이 모르고 있는 여인들을 만나보십시오. 당신이 알고 있는 우주 개발 임무의 이면에 가려진 여인들을 만나보십시오.(Meet the women you don't know. Behind the mission you do)' 창의력도 실행 능력도 뛰어난 도로시, 캐서린, 그리고 메리는 모두 백인 중심의 주류 사회에 혁신적 변화를 일으킨 위인입니다. 즉, '변화를 이끌어내는 위인들(change-makers)'의 표상이었습니다.

마고 리 셰틀리의 원작 논픽션은 미셸 오바마도 극찬한 바 있습니다. 저자의 집필 의도를 요약해 소개합니다. "가려진 채 잊힌 존재가 아닌, 미국 사회의 중심부에서 빛난 존재인 그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흑인이거나 여자이기 이전에 그들은 다 미국사의 중요한 일부이고 일원이기에."

외화번역가


※ 성인 독자에게는 영화의 원작인 '히든 피겨스-미국의 우주 경쟁을 승리로 이끈, 천재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이야기'를, 청소년 독자에겐 각색한 소설 '히든 피겨스'를 추천합니다.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