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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아누스 호리빌리스

엘리자베스2세 92년 발언…‘내 탓’ 과오 인정·자기반성, 사과 바탕 책임윤리 일깨워

아누스 미라빌리스 만들길

  • 이선정 기자 sjlee@kookje.co.kr
  •  |   입력 : 2022-12-11 20:05:23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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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개된 영국 왕실 관련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5는 엘리자베스 2세 전 영국 여왕의 ‘아누스 호리빌리스(Annus horribilis)’ 발언 에피소드를 다뤘다. 1992년 즉위 40주년 기념식에서 여왕은 라틴어로 ‘끔찍한 해’라는 뜻의 아누스 호리빌리스를 언급한다. 일종의 자기반성이다. 그해는 여왕에겐 인생을 헛살았다고 할 만큼 큰 고통의 연속이었다. 장남인 찰스 왕세자가 다이애나비와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어머니를 몰아붙이고, 차남인 앤드루는 바람 난 아내 탓에 망신을 당했다며 이혼시켜달라고 조른다. 동생인 마거릿 공주는 40년 전 평생의 사랑을 놓친 것을 두고 결혼을 불허한 언니에게 뒤늦게 원망을 쏟아낸다. 급기야 집인 윈저성에 큰불까지 난다.

잇단 불행이 모두 자기 탓인 것만 같은 상황에서 여왕은 ‘인생을 잘 못산 것 같다’며 후회와 성찰을 담아 즉위 40주년 기념사를 직접 쓴다. “1992년은 아누스 호리빌리스였다. 내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화해의 희망은 없다”며 국민과 가족을 상대로 반성문을 낭독했다. 어머니인 퀸 마더는 과오 인정이 군주의 신성함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국왕 사전에 사죄란 없어야 한다”고 말렸지만 여왕은 강행한다.

세밑, 2022년을 돌아보면 올 한 해가 여왕의 표현대로 아누스 호리빌리스였지 싶다. 한 해의 시작이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러시아는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 10개월째 전쟁 중이다. 지난달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집계를 보면 전쟁으로 어린이 408명을 포함한 6557명이 살해됐고, 어린이 750명 등 1만74명이 다쳤다. 또한 800만 명 가까운 난민이 발생했다. 특히 러시아군이 부차 이지움 헤르손 등지에서 자행했던 민간인 학살은 큰 충격을 안겼다. 우크라이나 측은 지금까지 확인된 러시아군의 전쟁범죄가 4만5000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지난 7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다시 핵 위협을 했다.

전쟁으로 국제사회도 큰 타격을 받았다. 자원 부국, 곡물 주요 수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 에너지가 폭등, 식량 부족 현상이 심화했고 이로 인한 인플레이션 심화, 공급망 붕괴, 경제성장 저하 등 파장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세계를 큰 고난 속에 빠뜨렸다. 고통은 가난한 나라에서부터 확산 중이다.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 저개발국은 경제 고통에 정치혼란 기후재난까지 더해지며 이중·삼중의 악순환에 허덕인다. 무엇보다 전쟁은 역사를 퇴보시켰다는 점에서 폐해가 크다. 30여 년 전 ‘미소 양극’이었던 냉전의 종식으로 세계는 대평화 시대를 맞았지만 다시 국제사회는 ‘서방 대 러시아·중국’이라는 신 대립구도를 형성하며 군사력 확장 등 불필요하고 파멸적인 경쟁에 내몰렸다.

전쟁 외에도 크고 작은 불행·혼란·논란이 올해 전 세계를 휩쓸었다. 영연방의 정신적 지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했고, 영국 총리가 40여 일 만에 바뀌는 과정에서 세계는 금융위기 위협에 떨었으며,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극우 정당이 약진하며 제2차 세계대전 직전과 같은 전조 증상을 보였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으로 빚어진 대만해협을 둘러싼 미중 갈등에 동북아지역 긴장은 최고조로 올랐고, 일본은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피격 사망을 계기로 내년 방위비를 20% 이상 올리는 등 재무장에 속도를 내며, 백지 시위까지 부른 중국의 강력한 ‘제로 코로나’ 정책은 세계, 특히 한국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우리나라로서도 올해는 아누스 호리빌리스였다. 지난 10월 29일 핼러윈을 즐기려 ‘젊음의 해방구’ 서울 이태원을 찾았던 청년 158명이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안전도 보호받지 못한 채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2014년 세월호 이후 다시는 이 같은, 국가 시스템 부재로 인한 인재가 없길 바랐지만 참사는 재연되고야 말았다.

아누스 호리빌리스의 절망을 딛고 내년은 기적 같은 멋진 해 ‘아누스 미라빌리스(Annus mirabilis)’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전제가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발언 같은 사죄와 자기반성이다. ‘내 탓’이라는 여왕의 언급은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와 연결된다. 칸트가 동기의 정당성 도덕성만을 강조했다면 베버는 이 같은 신념윤리에 책임윤리를 더한다. 의도가, 신념이 아무리 옳다고 한들 결과가 그렇지 못하다면 소용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정치인에게 이 책임윤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합법적 폭력 행사가 가능한 국가를 운영(정부 구성)하는 일을 정치인이 하기 때문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 이태원 참사의 책임자를 비호하는 ‘방탄’ 모드, 참사 유족 갈라치기나 마약검사 같은 교묘한 눈속임 속에서 책임윤리의 정치를 찾아볼 수 없다. 참담하지만 그래도 국민은 희망할 것이다. 회한 반성에서 출발해 새해 새 희망을 이야기하기를. 그래서 아누스 호리빌리스가 아누스 미라빌리스로 변하기를.

이선정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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