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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부끄러움

  • 국제신문
  •  |   입력 : 2022-11-29 19:55:50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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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외국인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그 사람과의 만남에 모든 것을 건다. ‘나’는 그가 자신의 부인과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하며 고통을 느낀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이전에 즐기던 독서나 외출 따위의 모든 활동을 자제한다. 여기서 ‘나’는 소설 ‘단순한 열정’의 주인공이자 작가인 아니 에르노이다. 그녀는 2022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아니 에르노는 말한다. “나는 단 한 줄도 허구를 쓴 적 없어요. 나는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래서 그가 쓴 모든 글은 사적이고 내밀한 일기, 에세이처럼 읽힌다. 자신이 잘 모르는 일에 관하여 떠든 적이 없는 그의 글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사건에 대한 발설들로 가득하다.

또 다른 소설 ‘부끄러움’은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아니 에르노가 아주 어린 소녀였을 때 그녀는 계단 끝에 쭈그려 앉아 울음을 멈추지 못한다. 아버지가 전지용 낫을 들고 어머니를 죽이려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에. 이처럼 아니 에르노는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건조하게 그 모든 시간과 장소를 묘사한다. 마치 다른 어떤 가족과 내가 아닌 다른 딸의 이야기인 것처럼 묘사하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올해는 노벨문학상에 대한 말이 많았다. “노벨문학상도 맛이 갔다. 문학성이라곤 전혀 없는 작품에 상을 주다니!” “생판 모르는 작가가 상을 받았다. 통속소설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니, 문학은 죽었다.” 내가 아는 작가들이 한 말들을 약간 옮겨보았다. 반대로 “올해 노벨문학상이야말로 제대로 작가를 찾아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가 상을 받았다”고 말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작년 이맘때 친구와 지인 몇 분에게 아니 에르노의 책들을 선물했다. 근 1년 만에 만난 송경원 장학사는 내게 말했다. “어떻게 정확히 예상하셨어요? 이듬해 노벨문학상 작가를요?”

나는 한국의 작가와 독자들의 반응이 유난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 에르노가 사는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난주에 파리에서 온 작가 패트릭 모리스 씨를 만났는데 그곳 사람들도 아니 에르노의 수상에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그는 1995년 파리에서 ‘한국문학포럼’이 열렸을 때 박완서 오정희 조세희 황동규 등의 작가와 아니 에르노, 이사벨 라캉 등의 프랑스 작가 간의 대화 내용도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도 아니 에르노는 “문학에 관한 판에 박은 관념과 선입관은 지긋지긋하다. 내 작품이 철저히 외면당해도 나는 내게 닥친 사건들을 이야기할 뿐이다. 부끄러움이 내 실존의 방식이다. ‘부끄러움’으로 봉인한 세상의 허위를 기록할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을 쓰는 게 나의 목표다”는 입장을 냉소적이며 논리적으로 피력했다고 한다.

‘부끄러움’은 뭘까? 부끄러움은 수치심 죄책감 수줍음 미안함 혐오감 등의 말과 혼용된다. 나는 윤동주 시인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서시’),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길’),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쉽게 씌어진 시’)

작가는 자신이 얼마나 존경받을 만한 인물인가를 설파하는 자가 아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쓰고 나면 숨고 싶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 땅에는 당당하고 떳떳한 작가들로 충만하다. 자신의 윤리성과 정의로움, 진실한 사랑을 알리려고 책을 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관념적 사랑과 위로의 전문가. 그런 자들이 수상하는 사회이다. 끔찍한 참사에 부끄러움도 책임감도 없는 정치인들이 자기 이름 적힌 화환을 전시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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