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은은한 빛으로 가득한 숲은 가을을 보내기 완벽했다. 노랗게 피어난 국화잎을 만지작거리다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 몸으로 주의를 기울이자 전신으로 스며드는 가을빛이 옷과 피부 사이의 공간으로 차올랐다. 안전한 보호막을 두른 기분이었다. 딱히 어떤 형체라고 할 수 없을 덩어리가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때 계곡을 따라 오르던 길에서 들었던 숲 해설사의 말이 생각났다.

“암석이 가진 본연의 색은 겉에서 봐선 알 수 없어요. 지난 수많은 시간 동안 깎여 나가며 퇴색되고 온갖 유기물이 덧입혀져 있죠. 이 돌을 쪼개어 부서진 그 속을 봐야만 알 수 있어요.”

예상치 못한 불안과 호기심이 찾아와 눈을 떴다. 검은 무언가가 노란 꽃들 사이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나의 그림자였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감정들이 겹겹이 뭉쳐진 계곡의 바위 같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깊은 슬픔과 억눌린 감정 그리고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던 날의 설렘과 놀라운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곳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나란 존재도 함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림자에 비친 여러 개의 자아를 통해 또 다른 나를 찾고 싶었던 것은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확인이라도 하듯 팔을 들어 올리며 몸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를 낯설게 보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에서는 내적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기괴한 행위를 한다. 립밤 먹기, 신발을 좌우로 바꿔 신기 같은 것들 말이다. 사소한 행동이 이상할수록 다중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의 힘을 더 잘 끌어올 수 있다는 설정이다.

종종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되면 나만의 ‘버스점프’를 하곤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꽃의 색과 향기를 깊이 들이쉬는 것이다. 수많은 고민을 잠시 접어두고 어깨를 편 뒤 심장을 두어 번 툭툭 두드린다. 그러면 선택에 대한 갈등과 실패,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에 대하여 두려움이 사라진다.

나의 의지가 약해질 때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할 때는 더 많은 힘이 필요하므로 일부러 붉은색 꽃을 한참 끌어안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때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이다. 지난여름, 푸른 바닷물에 몸을 담근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수영도 할 줄 몰랐지만 모두 개의치 않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튜브도 없이 말이다. ‘무작정 바다에 빠져보기’라고나 할까?

파도는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니다가 거칠게 밀어버렸다. 냉정하고 짜디짠 물이 눈에 들어왔다. 제멋대로인 파도는 어찌나 당당한지 내가 어떨지는 상관없어 보였다. 나는 힘껏 맞서보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갈 때쯤 잔뜩 움츠리고 있던 몸이 바닷물 위에 떠 있는 부표처럼 둥둥 떠다녔다. 변화무쌍한 세상의 경계를 따라 출렁이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바위 같은 그림자이기도 했고 물 위에 떠다니는 공일 수도 있었다.

저항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얼마나 처절한지 삶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또 보아왔다. 투쟁의 결과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있고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 있기도 하다. 그저 모든 순간의 선택이었다.

깊어가는 가을빛은 굳이 쪼개지 않아도 암석의 깊숙한 내면까지 비추어 그동안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만 같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그림자를 통해 스스로 볼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산에서 내려올 때쯤 빛의 각도와 방향이 달라졌고 나의 움직임도 달랐다. 삶의 다양한 정체성을 유연하게 드러내며 살아갈 내가 있었다.

다음엔 사랑의 언어를 손짓으로 표현하는 훌라춤을 출까 한다. 사랑의 꽃목걸이 레이를 목에 걸면 더 많은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모든 선택을 통해 나다운 삶을 창조해 내며 살아갈 때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기도 쉬워질 테니까.

차영은 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