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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끼니] 부산 사는 냉면광의 비애

  • 국제신문
  •  |   입력 : 2022-06-07 19:06:39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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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처음 맛본 것은 30년쯤 전이다. 서울 사는 선배가 데려간 을지로3가의 ‘을지면옥’이었다. 그전까지 차가운 면이라면 밀면과 냉국수만 먹고 살아온 나에게 투명하고 담백한 평양냉면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살면서 길러진 감각인지 혹은 맛 칼럼니스트가 되라는 운명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어떤 음식이든 처음 먹는 순간, 낱낱의 맛과 향을 분리할 수 있다. 이 능력은 난도가 높고 남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음식일수록 빛을 발한다. 처음 맛본 평양냉면도 그랬다. 평양냉면 육수를 두고 흔히들 ‘행주 빤 물 같다’는 표현을 쓴다. 그 정도로 밋밋하다. 그런데 내게는 전혀 달랐다. 육향과 감칠맛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렇게 세련되면서도 강렬한 음식이 있구나’ 싶었다.

냉면집에서는 밀면을 팔지 않는다.
그 후로 평양냉면 애호가가 되었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맹렬하게 평양냉면을 먹었다. 많이 먹고 자주 먹다 보면 음식의 계통이 그려진다. 나를 평양냉면의 세계로 인도한 을지로3가의 ‘을지면옥’, 중구 필동의 ‘필동면옥’, 강남구 논현동의 ‘진미평양면옥’, 중구 장충동의 ‘평양면옥’, 의정부시의 ‘평양면옥’ 등은 수도권에서도 비슷한 계열의 평양냉면으로 분류된다. 물처럼 담백한 육수가 특징인데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장충동 ‘평양면옥’의 육수가 가장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더 담백하고 물 같다는 의미다.

어느 날 장충동 ‘평양면옥’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명품 쇼핑백을 잔뜩 든 모녀가 들어왔다. 듣지 않으려 해도 들리는 대화로 짐작건대 부산 출신이 분명했고 첫 방문인 듯싶었다. 나는 속으로 ‘좀 힘들 텐데…’라고 생각했다. 모녀는 냉면을 몇 젓가락 먹더니 연신 갸웃했고 이윽고 따님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줌마! 여기 다대기 좀 주세요.” 그 순간 음식점 안에 있는 모든 손님의 시선은 일제히 모녀를 향했다. 아니, 나를 향하는 것 같았다. 아무 상관도 없는 나는 동향이라는 이유로 얼굴이 화끈거렸고 냉면 사발에 코를 박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사건 이후 부산에도 제대로 된 평양냉면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식업을 하는 후배와 뜻이 맞았다. 재료와 의지는 충만한데 문제는 정통 평양냉면의 조리법이었다. 내가 그 역할을 맡았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평양냉면 장인으로 인정받던 어르신을 찾아갔다. 꽤 거금을 어르신께 제안하고 평양냉면의 레시피를 부탁드렸다. 어르신은 카페테이블에 있던 냅킨 한 장을 꺼내시더니 깨알같이 평양냉면 육수의 재료와 조리법을 적어주셨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비싼 냅킨 한 장을 들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10년쯤 흘렀다. 이제 더 이상 부산은 평양냉면의 불모지가 아니다. 서울만큼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서울 못지않은 평양냉면을 선보이는 음식점들이 생겼다. 평양냉면을 먹기 위해 굳이 서울을 찾지 않아도 된다. 부산은 더 이상 평양냉면의 불모지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 해운대의 평양냉면 전문점 입구에 적힌 안내문에서 여전히 녹록지 않은 현실과 마주했다. 부산에 200곳이 넘는 밀면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냉면집에서 밀면을 찾는 부산시민이 많다. 부산 출신 맛 칼럼니스트로서 둘의 차이를 그렇게 강조했건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밀면을 사랑하는 냉면광으로서 더욱 분발해야겠다.

박상현 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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