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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붉기도 전에 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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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물을 찍는 사진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피사체는 상고대라고 한다. 상고대는 수증기나 서리가 나뭇가지 풀 바위 등에 얼어붙어 생긴 눈꽃인데, 그 자태가 가히 환상적이다. ‘강가 천만 그루 나무/밤 사이에 모두 영감으로 변했군/잘 어울리는 것은 동기(同氣)이기 때문이요/다듬어진 모습은 큰 장인 솜씨라네/바람결에 하얀 솜같이 가볍게 흔들리고/겨울 햇빛 영롱하자 붉게 물드는구나’. 다산 정약용은 1800년 12월에 쓴 오언율시에서 상고대를 이같이 묘사했다. 그는 이듬해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18년의 기나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다산의 삶을 보면, 해 뜨자 스러지는 상고대처럼 인생의 아름다운 시절은 짧다. 짧아서 더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지난 17일 한라산에서 올해 처음으로 상고대가 관측됐다. 윗세오름 왕관릉 삼각봉 등 한라산 곳곳이 다산 시구처럼 곱디 고운 흰 솜옷으로 갈아입었다. 올해 한라산 상고대는 지난해보다 7일 빨리 찾아왔다. 때 이른 한파 때문이다. 이날 전 지역이 영하에 빠져든 한라산은 가을을 훌쩍 건너뛰고 겨울로 직행했다. 서울 경기 등 중부 지방과 남부 고산지대 역시 마찬가지다. 태풍 곤파스가 아열대 고기압을 한반도로 밀어올린 지난 주까지는 초가을인데도 늦여름 같은 날씨를 보였다. 그러다 지난 14일 곤파스가 소멸된 뒤 시베리아 대륙에서 발달한 찬 공기가 들이닥치면서 한파가 시작됐다. 이 때문에 단풍이 실종될 상황이다. 속리산(10월 30일), 내장산(11월 7일), 가야산(10월 27일), 한라산(10월 30일) 등등 산림청 국립수목원이 예측한 국내 명산의 단풍 절정기는 10월 말에서 11월 초다. 전국 평균은 10월 26일로, 지난해보다 3일가량 늦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기습 한파로 예측지도가 망가졌다.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도 전에 잎이 얼어 뚝뚝 떨어지게 생겼다. 서정주 시인은 ‘초록이 지쳐 단풍 든다’고 했는데, 야속한 올해 천기는 지친 몸을 잠시 물들여 쉬게 할 시간마저 앗아가려 한다.

어디 단풍뿐인가. 피고 맺지 못한 채 지는 목숨은 또 얼마나 많은가. 지난 6일 여수 마리나 요트장에서 현장실습 도중 요트 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따러 잠수하다 숨진 여수해양과학고 학생의 시간은 아예 초록에서 멈췄다. 교육부도, 노동부도, 여야 당정 어느 누구도 그 멈춘 시간을 흐르게 할 해법을 내놓지 않는다. 아이들의 촛불에 묵묵부답이다. 그들의 정치는 실업고생의 삶과 꿈은 고려 대상이 아닌 듯하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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