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길남 씨가 어깨에 힘을 주더니 찻찻찻 내공을 실어 한 초식을 펼친다. 그러자 악당 8대도왕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는다. 그의 앞 컴퓨터 모니터엔 천황거성(天皇巨星)으로 불렸던 외팔이 왕우가 팔이 열 개 달린 것보다 더 화려하게 무공을 선보인다.

어젯밤 늦게까지 쇼 브라더스 제작, 장철 감독, 왕우 주연의 1967년 영화 ‘독비도 - 의리의 외팔이’에 심취했던 길남 씨. 날이 밝아도 여흥을 주체하지 못한 탓에 속편 ‘돌아온 외팔이’가 1인 명화극장에서 절찬리 상영 중이다.

아아, 대단하다. 지금 보니 그렇게 촌스러울 수 없는데 왜 이토록 가슴이 설레는 것일까? 불의로 가득 찬 세상을 바를 정(正)으로 헤쳐 나가는 고독한 사나이! 그래, 나도 이제 그만 쭈그려 있고 이 썩은 세상을 바로 잡을 멋진 소설을 쓰는 것이다.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길남 씨의 입에서 “엄, 엄마마야, 놀래라”가 튀어나온다.

“오빠, 오늘 스케줄 어떻게 되는데?” 시간은 오후 1시. 왕우의 명검보다 더 날카로운 마눌님의 눈빛공격에 길남 씨는 말까지 더듬는다. “나 지금 줌으로 영상강의가 있어서…. 오늘만 오빠가 애 좀 데리고 와요.”

갑자기 아파트 베란다 전방 3ｍ의 공사장 망치 소리가 깡깡깡 들려온다. 저 의리의 무협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건 0.1초도 걸리지 않는다. 오전 내내 빈둥거리던 소설가 길남 씨는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내미 참참양을 데리러 밖으로 나선다. 대형 레미콘이 집 앞 공사장으로 들어가느라 주위는 교통대란이다. 친척처럼 지내던 아파트 이웃 몇몇은 소음과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이사를 떠났다. 입주 때 들어온 가격으로 집값을 후려쳤다고 다른 주민들이 손가락질 했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이의 학교에 가기 위해 건널목을 건넌다. 그가 사는 아파트와 같은 시기에 지어진 대단지 아파트가 쭉 늘어서 있다. 불과 건널목 하나 차이인데 이곳은 입주 때보다 3배씩 뛰었다며 뉴스에 나오는 판이다. 바야흐로 부익부 빈익빈의 시대인 것인가?

“너거 집 같은 경우는 상업지구 공사라서 보상도 못 받는데이. 그냥 큰 맘 먹고 나와라.” “내 봐라. 나는 10년 동안 이사를 15번 했다. 그래서 지금 ○씨티 40층에 들어갔잖아. 작년 여름 조정대상구역 풀렸을 때 몇억 올랐다.”

“남들 다 하는데 나만 가만있으면 바보 되는 거지. 일한 노동의 가치보다 집에 투자한 가치가 몇 배나 되는데…. 안 하는 게 바본 거라.”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동창 몇몇을 만난 어제의 술자리에서 길남 씨에게 쏟아진 이야기이다. 술에 취한 남편은 아내에게 어디가 아직 괜찮다니 그쪽으로 뜨자고 했다. 당연히 말다툼으로 번졌고 까불다 몇 대 맞았으리라…. 그러고는 자기 방에 박혀 밤새 의리의 외팔이와 함께했던 것이다.

터덜터덜 걸어가 학교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아이가 방과 후 수업을 마치고 달려온다.

“아빠, 오늘은 아빠네? 나 운동장 놀이터에서 친구랑 좀 놀다오면 안 돼?”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신나게 운동장으로 달려간다. 길남씨는 학교 오른쪽으로 늘어선 아파트 대단지를 다시 쳐다본다. 대단지의 놀이터엔 펜스가 쳐져 그 아파트 아이들만 놀 수 있다고 한다.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지는 길남 씨….

30분쯤 뛰어논 아이와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빠, 우리 이사가?” 하고 아이가 묻는다. “아니, 이사 가면 좋겠어?”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아니, 지금 집도 좋아”라고 말한다. 아이의 가방을 든 한쪽 팔이 왠지 무거워진다. 마비라도 된 듯 쩌릿한 느낌이다. 길남 씨는 남은 손으로 딸의 손을 꼭 쥔다. “가는 길에 왕만두 사줄까?” “응!”

길남 씨가 숨을 크게 쉬고 걷는다. 다시 무협의 세계로 들어간 느낌이다. 햇살이 부녀를 따스하게 비친다. 이제 봄이 온 것이다. 조금씩 더 단단해져야 할 시기가 왔는지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