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말.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혼밥’이 일상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 이상이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말 없이 밥만 먹는다는 건 상상 밖의 일이다. 그런 일을 코로나19는 상상을 뛰어넘고 현실화했다. 요즘 일본 식당가에는 침묵의 식사, 이른바 ‘묵식(默食)’이 유행이라고 한다. 후쿠오카시의 한 카레집 주인이 식사 도중 침방울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한 자구책인데, 호응을 얻어 전국으로 번져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식당뿐 아니다. 공중목욕탕에선 ‘묵욕(默浴)’을, 헬스장에서는 ‘묵트레이닝’을 권장하는 등 ‘침묵 릴레이’가 다른 서비스업종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우리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밥을 먹지 않을 때는 반드시 마스크를 써 달라”는 당부가 귀에 익은 지 오래이니, 사실상 ‘묵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유구한 인류 역사가 갈고 닦아온 밥과 말의 동거 문화에 코로나가 끼어들어 파탄을 낸 것이다. 이러니 어찌 코로나 전후의 문명 전환을 예견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코로나 시대에는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일컫는 ‘식구(食口)’라는 단어마저 사어(死語)가 되어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밥과 말의 별거 원인에는 코로나만 있는 게 아니다. 정치의 책임도 크다. 말의 권위를 실추시켜 말할 의욕을 잃게 만든다는 얘기다. 부산·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둔 우리 정치권의 행태가 그 표본이다. 먼저, 국민의힘이 제기하는 문재인 정부의 북한 원전 건설 지원 의혹부터 보자.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국민의힘 지도부는 산업통상자원부 직원이 작성한 ‘북한 원전 건설’ 문건을 근거로 문 정부가 그런 시도를 했다고 주장하며 ‘이적행위’로 단정했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무리한 단정이란 사실이 드러난다. 원전 건설은 미국의 대북 제재 해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미국의 제재 때문에 문 정부의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도 ‘착공 없는 착공식’만 한 뒤 아무런 진척을 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마당에 미국의 최대 민감 사안인 핵을 다루는 원전 건설이 가능하겠는가. 설령 제재가 해제된다 해도 원전을 건설하려면 한국형 원자로의 원천기술을 보유한 미국이 북한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때 우리 원전을 수입한 아랍에미리트도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했다. 게다가 문건의 서두에 ‘내부 검토자료이며, 정부 공식 입장이 아니다’고 적혀 있지 않은가. 국민의힘의 이적행위 단정에는 이런 팩트를 체크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의 말에 권위가 실리기 힘든 이유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말의 권위가 떨어지긴 매한가지다. 민주당은 국민의힘 김 위원장이 부산 가덕도~일본 규슈 간 해저터널 건설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공약하자, 일본을 돕는 ‘이적행위’라고 규정했다. 일본의 숙원인 대륙 진출 통로 구실을 할 한일해저터널이 건설되면 일본 시장으로 우리가 흡수되는 ‘빨대 효과’가 발생할 것이라는 논리다. 민주당의 규정대로라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도 친일 행위자가 된다. 김 전 대통령은 1999년 한일정상회담 때 “한일해저터널이 건설되면 홋카이도에서 유럽까지 연결되니 미래의 꿈으로 생각해 볼 문제”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도 2003년 “한일 간에 해저터널이 뚫리면 경제적 의미뿐 아니라 한일관계가 가까워질 것”이라고 했다.

말의 권위 실추가 어디 이뿐인가. 부산·서울시장 보선을 “성평등·미투 선거”라고 선언했던 정의당의 전 대표는 함께 ‘젠더 폭력’ 근절을 다짐한 동료를 성추행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배반하기도 했다. 정의당이 이번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기로 방침을 정하고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인 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흔히 정치를 ‘말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치 언어가 이렇듯 신뢰와 권위를 잃을 지경이면, 그 수사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불가에서 꼽는 열 가지 참회 죄업 중에 말과 관련된 게 네 가지나 된다. ‘악담’이나 ‘망녕된 말’, ‘두 가지 말’뿐만 아니라 ‘비단결 같은 말’도 무거운 죄를 짓는다고 한다. 마치 우리 사회의 정치 언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묵식’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은 건 그래서다. 묵언수행처럼 말로 지은 죄업을 참회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다. 단순히 말 없이 밥만 먹는 데 그치지 말고, 왜 이런 미증유의 피해를 동반한 감염병이 발생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포스트 코로나’의 새 시대를 기대할 수 있다.

때론 침묵이 말보다 더 웅변적이다. 덧없는 말이 홍수를 이뤄 말의 가치가 땅바닥에 추락한 지금이 그렇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마지막 명제가 천근만근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지금은 침묵이 필요한 시간이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