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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끼니] 백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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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8-19 19:28:58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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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9월 4일 농림부 장관과 보사부 장관은 4개 항의 ‘식생활개선방안’에 합의한다. 1. 모든 음식점에서 점심은 보리의 혼식 여부를 가리지 않고 ‘백반’을 팔지 못한다. 2. 아침과 저녁은 25%의 보리를 혼식 판매한다. 3. 탕류도 25%의 보리 및 면류를 혼식 판매한다. 4. 관공서와 공공기관에서는 면류와 빵만 팔도록 한다.
잘 차린 백반 한 상. ‘쌀밥의 위용’이 그 바탕에 있다.
반세기 전 우리나라 형편이 이랬다.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 문제지만, 당시는 쌀의 절대량이 모자랐다. 생산이 늘지 않으니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국민을 굶주림에서 구하기 위해 국가가 국민의 밥에 간섭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졌다. 정부의 의지는 확고했고 정책은 강력했다. 심지어 이 합의는 지금까지도 우리 밥상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나는 이 합의를 한국인의 식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꼽는다.

제4항부터 보자. 관공서 구내식당에서 ‘밥’을 아예 팔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그때도 국가는 공무원이 제일 만만했다. 국민이 따르기 싫은 정책이니 공무원이 솔선수범해야 했다. 당시 서울시는 건강식으로 햄버거를 적극 권장했다. 자칫 맥도날드가 서울시청 구내식당을 운영하는 상황이 벌어질 뻔도 했다. 공무원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엄혹한 군사정권 아래서 감히 드러낼 수 없었다. 대신 점심시간이면 구내식당을 버리고 밖으로 떠돌았다. 관공서 주변 음식점이 호황을 누렸다. 금기는 오히려 욕망을 부채질한다. 한국 공무원이 점심밥에 유난히 까다로운 건 이 시절에 대한 반동이 낳은 결과일 수 있다. 밥에 보리를 섞는 것과 탕에 면을 섞는 것은 아주 다른 결말을 맞는다. 보리를 섞은 밥은 쌀 생산량이 늘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리밥의 거슬거슬한 식감이 싫었다. 하지만 설렁탕, 곰탕, 돼지국밥 등에 국수사리를 말아 먹는 습관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굳건하다. 오히려 탕을 먹을 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됐다. 국물에 면을 말아 먹는 걸 워낙 좋아하는 국민이라 이 정책에는 누구도 불만이 없었다. 면의 비율을 50%로 늘렸어도 기꺼이 따랐을 것이다.

이제, ‘식생활개선방안’의 핵심 쟁점이다. 1. ‘모든 음식점에서 점심은 보리의 혼식 여부를 가리지 않고 백반을 팔지 못한다.’ 이때 ‘백반(白飯)’은 말 그대로 흰밥 즉 쌀밥이다. 조선 시대 이후 우리 민족 생활사를 보면, 사실 먹을거리 자체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이 먹어 문제가 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단 한 가지, 하얀 쌀밥만큼은 언제나 부족했다. 오죽하면 다른 나라에서 ‘하얀눈꽃(Chionanthus)’으로 부르는 나무를 눈 대신 밥으로 생각해 ‘이팝나무’라 했다. 이런 국민에게 백반을 금지하니 심리적 저항이 만만찮았다.

불만은 점차 행동으로 나타났다. 국가가 원하는 대로 점심에는 쌀밥을 양보했다. 대신 아침·저녁에 맘껏 먹었다. 결국, 온전한 쌀밥이 놓이는 것 자체로 완벽한 밥상이 됐다. 함께 놓이는 국과 찬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백반은 쌀밥을 넘어 ‘쌀밥이 놓인 밥상’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수백 년 써오던 ‘반상(飯床)’을 미련 없이 버리고 백반을 택했다. 찌개백반과 백반집은 그렇게 탄생했다. 오늘도 대한민국의 가장 많은 직장인이 선택한 점심메뉴는 백반이다. 이렇게 무서운 국민이다.

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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