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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터치] 호젓하고 고요하게 /임규찬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6-29 19:24:18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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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것’에 대한 질문과 요구를 해야 한다. 질문과 요구는 헛된 것일 수 없다. 잘 사는 것은, 거칠고 개별적이지만, 돈과 감동이다. 돈은, 궁핍이 무용감과 우울로 나아가지 않는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 감동은 근원에 닿아있고, 깊은 것을 경험하는 희열이다. 잘 사는 것에 관한 한 감동은 돈에 못지않다. 감동이 간간이 박혀 있어야 견뎌야 하는 삶이 온전해진다.

좋은 글을 만난 밤 호젓하고 고요하게 걷는다. 이런 밤이면 굴욕과 상처와 가난과 걱정과 설렘과 계획과 귀찮은 일들과 현실적인 것들은 끼어들거나 표면으로 올라올 여지가 없다. 개의치 않는 기쁨을 오롯이 향유하는 것은 좋은 협력만큼이나 드물고도 반가운 일이다.

시간은 욕망과 결합되어 있다. 오후 4시는 술과 친구와 우정이다. 혼자 밤을 맞아야 한다는 예정된 외로움은 사무실을 뿌옇게 덮쳤다. 최근 통화와 카톡을 훑었다. 머리 한쪽에서는 오늘 읽을 책과 써야 할 글들에 대한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었다. 통화버튼 누르기와 혼자 버티기 사이 갈등은 10분 이상 지속됐다. 통화버튼은 왠지 모를 굴욕이라는 생각이 쑥 밀고 들어왔다.

책 읽기로 들어갔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 316~372쪽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 아름다움의 향연. 영국인 환자 알마시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 인간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 이야기해주겠다고 약속했었지요.

-나는 책에 등장하는 냉소적인 악인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인생의 시기에 도달했지요.

-하지만 인생에서의 길은 갑자기 드러나는 겁니다.

-후에 우리가 서로의 욕망을 인식했을 때 이전의 순간들이 이제는 암시적 의미를 띠며 심장 속으로 도로 밀려 들어왔지요.

-그녀는 언제나 말을 원했습니다. 말을 사랑했고, 말을 먹고 자라났지요. 말을 통해 그녀는 명징함을 얻었고, 이성과 형태를 가질 수 있었지요. 반면 나는 말은 물속에 박힌 막대기처럼 감정의 흐름을 바꾼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이의 애정은 말로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남겨졌죠.

-그는 세계를 쓰고 해석하는 남자였어요. 지혜는 감정을 최소한으로 전달받는 데서 생겨납니다.

-방의 맨 구석에서 그녀 위로 누운 알마시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려 하며 자신의 금발을 빗어 넘기고 무릎을 꿇고 일어났습니다. 그도 한때는 섬세한 남자였으니까요.

-나는 이런 일들을 믿어요.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질 때면 우리의 영혼에는 역사인 부분, 약간 현학적인 부분이 있어서 서로를 모르고 지나쳤던 만남이 있었음을 상상하거나 기억하지요.

-하지만 몸의 모든 부분은 이미 다른 사람을 위해 대비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는 공동의 역사, 공동의 책입니다.

마이클 온다치는 1943년 스리랑카에서 태어났다. 1954년 캐나다로 이주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1991년 발표됐고, 1992년 맨부커상을 받았다. 1996년 영화로 제작돼 69회 아카데미상 9개 부문, 47회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 골든글로브 2개 부문, 영국 아카데미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소설과 영화 두 영역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은 56쪽 분량이다. 회상 문학에는 그 근원에 아름다운 슬픔이 내재되어있다. 소리 내어 천천히 읽었다. 감당하고픈 희열 때문이었을 것이다. 쑥 들어오는 문장 앞에서는 멈추었다. 서성이고, 물을 마시고, 커피를 마셨다. 목이 아프면 쉬었고 자세가 불편하면 고쳐 앉았다.

드디어 10시가 되었고, 읽기를 마쳤다. 줄 친 문장들을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움 위에 확신이 쌓였다. 삶의 기준과 목표로서 자기 확신. 고통과 자책으로 점철돼 있을지라도 끈질기게 삶을 밀고나가게 하는 그것, 자기 확신! 타이핑은 끝이 났다. 도로는 캄캄하고 차 안은 조용했다. 오롯이 존재하는 자부심은 부풀어 올랐다. 주차를 했다. 보름달은 빈 곳 없는 만족을 누리고 있었고, 꽃은 밝았다. 바람은 바쁘지 않았다. 나는 호젓하고 고요하게 걸었다. 감동이 떨어질 수도 있기에.

동명대 겸임교수·도서출판 함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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