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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시민이 응당 걸어야 할 길 /권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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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9-05-08 19:28:38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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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도 더 지난, 대학 시절 얘기다. 딴엔 글 쓰며 사는 사람이 되겠다고 문학회 활동을 하던 때였다. 학교 축제를 끝내고 동아리 선후배들과 범어사 아래 어딘가에 자리 잡고 밤새 술을 들이켰다. 어느 극단의 공연 제목으로 기억되는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이 문구에 푹 빠져 모두가 자다 깨다 새벽까지 술잔을 놓지 않았다.

새벽이 왔으니 ‘길을 떠나기’로 했다. 열대여섯 명이 있었던 거 같다. 목적지는 금정산 고당봉. 이미 졸업해 중년이 된 선배들은 술 취해 비틀거리는 후배들 등을 세차게 밀었다. “이렇게 나약해 빠져서야 앞으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모두가 길을 떠났다. 그런데, 금정산 정상에 올라 호연지기를 기르겠다는 우리의 당찬 의지는 입구에서부터 가로막혔다. 범어사 요금소 관리인은 우리 일행의 수를 정확히 세어 명당 얼마씩 입장료(문화재 관람료)를 내라고 했다. 이때부터 ‘희대의 싸움’이 벌어졌다.

해가 뜰락 말락 하는 시간이었다. 저 너머로 붉은 해가 막 얼굴을 내밀려는 순간이었다. 안내판에 적힌 범어사 관람(운영) 시간이 우리 눈에 들어왔다. ‘일출~일몰’. 우리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았으니 입장료를 낼 수 없다”고 악을 썼다. 그때부터 싸움은 입장료를 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해가 떴느냐 안 떴느냐를 가리는 시비로 변질됐다.

우리는 “저 너머를 보세요. 해가 아직 안 떴잖아요”라는 말을 수십 번 반복했다. 관리인은 “어허, 이 사람들이. 지금 해가 떴잖소”라고 계속 응수했다. 싸움은 제법 길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가 불리한 싸움이었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올수록 해는 높이높이 뜨는 게 자연의 이치 아닌가. 싸움이 끝날 때쯤 해는 이미 환하게 떴다. 어쨌든 해가 떴으니, 우리는 졌다.

졌지만, 한 선배는 시원하게 한마디 남겼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싸움에 지친 관리인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요?”

그 선배는 당시 부산에서 제법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선배가 신분을 밝히고, 논리적으로 좀 더 따져볼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고,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긴요. 부산시민이에요!” 맞다. 응당 시민이면 가야 할 길을 우리는 마음대로 가지 못했다.

국립공원을 비롯해 전국 명산에 자리한 사찰의 입장료를 둘러싼 갈등은 해묵었다. 2007년 정부는 “국립공원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며 공원 입장료를 없앴다. 그런데 공원 입구에서 사찰이 입장료를 받으니 시민으로선 여간 기분 나쁜 일이 아니다. 아직 국립공원 내 사찰 24곳이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산적 통행료’로까지 불린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폐지하겠다고 공약까지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그동안 사찰 입장료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범어사는 우수 사례로 꼽혔다. 범어사는 부산시와 협의해 2008년부터 입장료를 폐지했다. 요금소에서 끊이지 않던 승강이도 멈췄다. 지금도 시민 누구나 범어사는 물론 범어사를 거쳐 금정산성 북문까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하지만 범어사가 11년 만에 입장료 재징수를 추진하고 나섰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입장료를 받는 다른 사찰과의 형평성, 10년 넘게 동결된 시의 문화재 관리 지원금 등 현실적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80여 개 국가·시 지정문화재를 관리하는 수고와 비용을 생각하면, 범어사를 일방적으로 탓할 수는 없다.

시가 다시 나서줘야 한다. 최근 지리산 천은사가 32년 만에 입장료를 폐지하면서 다시 사찰 입장료 논란에 불이 붙은 지금, 시와 범어사가 또 하나의 모범 사례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시는 올해를 ‘보행 혁신 도시 만들기’ 원년으로 선포했다. 새길을 뚫어도 모자랄 판에 시민이 응당 걸어온 옛길을 다시 막을 수는 없잖은가. ‘부산의 허파’ 금정산에서 돈을 내느냐 마느냐, 해가 떴느냐 안 떴느냐를 놓고 승강이하는 일이 또다시 벌어져선 안 되겠다.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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