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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일본과의 화평을 잊지 마십시오” /이호철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4-01 19:22:05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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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컨대, 일본과의 화평을 잊지 마십시오.”

신숙주가 유언처럼 성종대왕에게 남긴 말이다. 임진왜란의 큰 화를 당하고 나자 류성룡은 과거의 잘못을 경계하여 후환을 대비하자는 의미에서 ‘징비록’을 썼다. 이 책의 첫 장은 일본 사신의 내한과 신숙주의 이 말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말에 성종은 서둘러 일본에 사신을 보냈지만 대마도에서 병을 얻어 되돌아왔다. 그후 일본으로의 사신 파견은 계속 잊혔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이것이 1592년의 임진왜란이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이웃나라와 사귀고 방문하는 것은 풍속이 다른 나라를 달래고 접대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그 실정을 알아야 예를 다할 수 있고, 그 예를 다한 연후에야 그 마음을 다할 수 있다’며 대일 외교법을 언급했다. 일본에 대한 이해를 위해 지리, 역사 등 현지 실정과 접대예절을 서술한 이 책은 오랜 기간 대일 외교의 기본서로 활용됐다.

임진난이 끝나고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1811년 12차를 마지막으로 일본은 더는 조선통신사의 방문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동안 조선의 통신사들은 예를 갖추고 성리학의 진수를 일본에 전해주려고 애써 왔다. 이들은 일본 풍습 등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될 정도로 방대한 여행기록을 남겼다. 왜 일본과의 교류가 막혀 버린 것일까. 일본에도 이유가 있었겠지만 우리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조선은 성리학에 대한 자부심이 유독 강했다. 이 때문에 통신사들은 많은 관찰 기록을 남겼지만 빠르게 발전하던 일본의 상공업과 군사력의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성리학의 관점으로만 재단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틀에 갇힌 조선통신사들에게 일본은 여전히 한반도 문화로 개화한 ‘왜국’이었을 뿐이었다. 일본이 신문화 가치의 교류를 원했을 때 우리는 주자학만 논함으로써 양국 간의 시대적 요구를 놓쳐 버린 것이다.

1868년 일본에는 명치유신이 일어나 왕정복고가 이뤄졌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한일 관계도 통상을 중심으로 한 서구식 영사외교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신정부는 종래의 관계를 새롭게 하자는 요청 문서를 조선에 보냈다. 하지만 우리 관리들은 그 내용과 문구가 종전과 다르다는 이유로 접수조차 거부했다. 결국 1876년 일본은 운요호를 강화도에 끌고 와 강압적 분위기 속에 한일수호조약을 맺었다. 고종은 서둘러 수신사를 일본에 보냈다. 그런데 수신사도 여전히 과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신사 김기수는 ‘일동기유’란 기록을 남겼다. 일본은 수신사에게 군제를 개혁하고, 편리한 기계를 모방하고, 좋은 제도는 채용하라며 여러 곳을 보여주며 도와주겠다고 했다. 조선이 빨리 부국강병을 이뤄 두 나라가 서로 의지하여 외환을 방어하자고 했다. 하지만 수신사는 “이 사람은 또한 산중의 빈사로 견문이 넓지 못하고 재식이 전혀 없으며…”라며 겸양의 예의만 차리면서, 이는 수신사의 업무가 아니라고 에둘러 거절했다. 결국 불행한 한일관계는 반복됐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두 나라 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현재 한일 간에는 다방면에 걸쳐 인적, 물적 교류가 매우 활발하다. 민간 교류가 외교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적 요구는 민간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미래지향적인 방향에서 찾아야 한다. 예컨대, 동북아의 안정, 자유·시장경제 가치의 존중, 지속 가능한 경제 번영 등이 공동 관심사가 될 것이다.

과거사 문제도 정부보다는 민간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와 달리 분권적 전통이 강한 일본에는 항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독도, 위안부 문제만 해도 일본 내에는 한국에 우호적인 계층과 그렇지 않은 부류가 공존한다. 반대의견에 각을 세우기보다는 양국 간 이해와 협력이 공동이익임을 보여줘 우호 세력을 확대하는 것이 외교현안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길이다.

서로 풍습이 다른 상대의 실정을 이해하고 예를 다해 마음을 열자. 이웃 일본과의 화평을 잊지 말라는 신숙주의 고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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