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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지음(知音)을 기다리며 /박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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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8-10 20:21:42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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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출신인 거문고의 명인인 유백아(兪伯牙)는 진나라에 가서 출사했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무의미한 세월을 보내다가 자기 음악의 경지를 열어준 스승을 찾아 고국 초나라로 돌아간다. 그러나 스승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려 심한 상실감에 빠진다. 하지만 자신의 거문고 연주를 알아주는 종자기라는 사람을 만난다.

유백아가 큰 산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우람하다, 태산이로구나”라며 감탄했고, 또 흐르는 물을 연상하면서 거문고를 타면 “유장하도다! 장강이여, 황하여!” 하며 거문고 소리에 취하곤 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음(音)을 아는 지음(知音)의 친구(知己之友)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지음인 종자기가 죽자, 유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절박한 옛날이야기다. ‘절현(絶絃)’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그렇듯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시대와 장르가 다르지만 오늘날 한국 소설의 처지가 그렇고, 그 소설을 쓰면서 변두리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내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아니 한국 소설은 죽었고, 끝났다며 여기저기서 신음이 들려온다. 조금 과장하면 아무도 소설을 읽지 않는다. 항상 서점의 베스트셀러 상위를 장식하던 한국소설이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다.

유백아처럼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기에는 소설이란 장르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간다. 소설은 어차피 시장에 어울리는 장르인 것이다. 시장이라는 것은 적절한 보상을 의미한다. 요즈음은 워낙 책이 팔리지 않으니까 판매에 따른 보상 외에도 각종 지원금이나 상금도 많다. 그것도 너도나도 소설을 쓰겠다는 사람이 쏟아지면서 물이 흐려져 옥석을 가리기가 어려워졌다.

독자 없는 소설은 없다. 소설은 선방에서 수도하는 수도승들의 선시(禪詩)처럼 자신의 내면적 울림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시(詩)는 독자 없이 생존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소설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직도 소설책은 쏟아지고 소설가는 양산된다. 소설책은 쓰레기가 되고 소설가는 쓰레기 무덤으로 기어들어간다.

42회째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빠짐없이 사서 읽었다는 어느 독자는 감흥이 없다면서 소설 독서의 의욕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상 문학상 수상집 절독을 선언했다. 이상문학상뿐 아니라 다른 수상 작품도 그렇고, 신춘문예 당선작들도 감동과 자극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저 저희만의 리그일 뿐이고 독자들에게 관심을 끌지 못한다.
어쩌면 백여 년 역사를 가진 근대문학으로서 소설은 끝났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설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독자나 소설을 생산해내는 소설가에게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이웃 일본에서는 여전히 소설책이 잘 팔린다.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소설가가 새 소설을 출간하면 서점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풍경은 여전하다.

어느 순간(1990년대)부터 소설이 본래 모습에서 궤도 이탈을 했다. 궤도 이탈은 일부 여성작가와 평론가가 주도했다. 그 궤도 이탈이라는 것은 고유의 서사를 버리고 표현이나 형식의 미학 쪽으로 가버린 것을 말한다. 한동안 독자들은 그런 언어 표현에 재미를 느꼈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빠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어떤 의미나 재미를 기대하며 인내를 감수하며 읽기도 한다. 읽고 나면 별로 남는 것이 없다. 곧 소설은 지루하거나 따분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국소설 몰락에서 문학교육을 뺄 수 없다. 문학교육은 입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술작품으로서 감상이 사라지고 완전히 시험의 도구로 전략해 버렸다. 감상뿐 아니라 작가에 관한 부분도 가르치지 않는다. 대학 시험에는 작가에 관한 것을 출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에 출제를 하지 않으니 교실에서는 작가가 배제된다. 예술 작품이란 것은 그 작품을 창작한 작가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작가를 배제시켜놓고 그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문학 작품에 영혼을 빼버리는 것과 같다. 대개의 명작들은 그 작품과 그 작품을 생산한 작가의 삶이 어우러져 어떤 고상함이나 신비감을 형성해 감동을 더하는 것이다. 문학 작품은 단지 시험의 텍스트로서 역할뿐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학은 수학처럼 건조하고 딱딱한 교과목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을 쓴다. 소설만큼 위대한 예술 장르가 없기 때문이다. 설사 독자가 정말 유백아처럼 아무도 없다 해도 나는 펜을 꺾지 않고 계속 소설을 쓸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종자기와 같은 지음을 기대하는 속내는 숨길 수 없다. 나를 감동시킬 위대한 그분이 어딘가에 존재함을 믿고 싶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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