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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타인의 삶과 리빙 라이브러리 /이국환

예전보다 나은 삶 만들기, 타인의 인생 속에 길 있어…서로를 책 읽듯 배워가면 세상은 더 천국을 닮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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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6-06 19:00:21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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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안 헨켈 폰 도널스마르크의 ‘타인의 삶’은 영화 시나리오로는 드물게 국내에 번역되어 책으로 출간됐다. 영화는 2007년 봄, 국내 개봉 당시 상영관을 잡지 못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으나 이후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2013년 재개봉했다.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대상을 ‘읽는’ 것만큼 관심과 집중을 요구하는 행위는 드물다. 그래서 능동적인 관객은 영화를 읽고, 수동적인 독자는 책을 본다. 감독이자 작가인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널스마르크는 그의 책 ‘타인의 삶’으로 마치 자신의 영화를 읽어달라고 우리에게 청하는 듯하다.

작년부터 ‘독서, 책에 길을 묻다’라는 다소 긴 이름의 교과를 개설해서 수업하고 있다. 책 속에 우리 삶의 길이 있다는 취지로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책을 선정하여 학생들과 함께 읽고 토론하는 과목이다. 이번 학기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인문 자연 체육 공학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내 수업을 수강했다. 이 수업에서 한 주 정도는 책이 아니라 사람을 읽는 리빙 라이브러리 수업을 한다. ‘리빙 라이브러리(living library)’는 ‘휴먼 라이브러리’ ‘사람 책 도서관’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고 있는데, 사람이 책이 되어 독자와 소통하며 지식과 경험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기록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는 사람들의 기억과 구술이 곧 책이었다. 타인의 삶을 문자로 기호화한 것이 책이며, 그 내용은 결국 그 책을 쓴 사람의 경험, 지식과 사유이다. 누군가의 서술이 책이라면, 문자로 자신을 기록하여 남기지 않는 사람의 구술이 ‘사람 책’이 된다. 리빙 라이브러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하고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편견과 선입관, 고정관념을 넘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누구나 책이 될 수 있고, 누구나 그 책을 읽을 수 있다.
리빙 라이브러리 수업을 위해 ‘사람 책’의 지원을 받았는데, 체육 전공의 졸업반 학생이 자청했다. 듬직한 체구에 과묵한 성격으로 성실히 수업에 참여했던 그 학생은 평소 표현을 잘하지 않았기에 토론 수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의 사람 책 제목은 ‘방황’이었다. 청소년기의 가출, 대학 진학 후의 방황과 군 시절 탈영 사건까지 그의 방황 이력은 파란만장했다. 고교 시절 복싱으로 단련되어, 외항선 갑판 위에서 ‘학교짱’과의 결투 장면을 말할 때조차도 그의 말은 허황과 과장 없이 담담했다.

어떤 좋은 책을 추천하여 읽었어도 그날만큼 학생들의 눈빛은 반짝이지 않았다. 독자인 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졌고, 이어진 질문의 끝은 그 방황을 어떻게 극복해 갔는지로 모였다. 비결은 독서였다. 알고 싶은 것이 많아 종교와 철학 서적을 읽다, 법정 스님의 책을 만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힘이 되었다고 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어두운 동굴을 빠져나와 진흙 속의 진주처럼 환하게 빛났으면 좋겠다”는 말로 마무리한 그날, 수업이 끝나고 게시판에 학생들의 반응이 쏟아졌다. “종이 책보다 사람 책이 더 가깝게 느껴져서 좋았다”는 말부터 “어떤 책보다 값진 배움이 있었다” “이번 학기 가장 가슴이 따뜻해지는 수업이었다 ”등 반응은 뜨거웠다.

영화 ‘타인의 삶’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 동독을 배경으로 자신의 신념을 맹신하는 냉철한 비밀경찰 비즐러가 극작가 드라이만을 감시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삶에 감동하여 이전의 삶과는 달리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비즐러와 같은 조직의 하수인이 자유인으로 변하는 힘은 반성의 사유에 있다. 사람은 혼자서 변하거나 성장할 수 없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이라는 타인의 삶을 감시하다 결국 자신의 삶을 직시하며 자기 성찰의 과정을 겪는다. 고귀한 삶이란 타인보다 나은 삶이 아니라, 이전의 자신보다 나은 삶이다. 비통함으로 물결치는 드라이만의 피아노 연주를 감청하다 눈물을 흘리고, 소파에 누워 드라이만의 책상에서 가져온 브레히트의 시집을 경이롭게 읽는 비즐러는 더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타인의 삶이 호기심과 관음증을 충족하는 창이 아니라 자기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될 때 우리는 책을 읽듯 반성의 사유에 이른다. 연예인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담은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으로는 타인의 삶을 읽을 수 없다. 리빙 라이브러리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바탕에 깔려 있으며, 그 공간이 도서관이나 학교에만 머물지 않는다. 보르헤스는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 천국을 도서관에 비유했다. 사람을 책으로 여겨 서로 읽고 배울 수 있다면, 그리하여 타인의 삶을 읽고 성찰하여 과거의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사람 책을 모아둔 도서관 같은 이 세상이 천국을 닮아가지 않을까. 타인의 삶이 ‘사람 책’이 되는 순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고, 책보다 소중하다.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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