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의 동생은 서두부터 급했다. 아, 내 진짜. 부산 남자 특유의 무뚝뚝한 감탄사. '내 진짜'란 단어가 튀어나올 때부터 예삿일이 아님을 짐작했다. 왜 그러냐고 재촉해도 첫마디를 못 떼 아~ 내, 아~ 우짜란 말이고, 만 반복하던 동생은 부산 여자인 누나가 '버럭'을 하기 직전에야 사연을 털어놓았다.

내가 으짜다 보니까 화이트데이를 그냥 넘어갔어. 이 사태의 알파와 오메가가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1년 365일 출근하는 영어 강사인 내 남동생은 일이 바빠 여자 친구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제 딴에는 늦은 밤에 퇴근한 후라도 과자와 커피를 사 들고 그녀의 집 앞으로 가 야간 데이트를 해 온 모양이지만 이번, 화이트데이만은 이도 여의치 않았다. 하필 직장인 영어 개인 교습 두 개가 겹쳤고, 학원은 밤 10시에야 수업이 끝났다. 개인 교습 두 개를 마쳤을 땐 이튿날 새벽 2시, 여친은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상태였다. 아침에 산 사탕 부케는 동생의 원룸 구석탱이에서 뜨뜻하게 녹아가고 있었다. 원래는 오늘 보기로 했는데 삐끼가꼬, 친구 만나러 간다고 가삣다. 메시지 확인도 안 한다. 누나야, 우짜노?

이 녀석은 대체 왜 이럴까,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깊은 상념에 잠겼다. 10년간 줄기차게 해온 연애경력은 어느 솥에 죽을 다 쒀 먹고 친누나에게 대책을 간구하고 있단 말인가? 친누나와 하는 통화에 연애 이야기를 하는 건 낯뜨겁지 않은가. 그것도,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 다발을 받고 화이트데이에 입을 싹 닦은 초유의 사태에 대한 조언을 구하다니. 나더러 지구라도 구하란 말인가? 그러나 상념 끝에 발동한 건 나의 태평양 같은 오지랖이었다. 일단 장미를 사라. 첫 번째 임무를 지시하며 나는 수화기를 어깨에 끼고 스마트폰으로 지도 검색을 했다. 니 원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김해화훼단지가 있다. 꽃 30~40송이를 사. 알이 작은 걸로 하면 헛수고다. 알이 애기 주먹만 하게 굵고 싱싱한 걸로 골라라. 그리고 잊지 마라. 포장은 가장 간단하게 해라. 사장님이 이상한 부직포나 그물 같은 걸로 칭칭 감아 주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울어. 지금 전송하는 이 사진을 보여주고 이거랑 똑같이 포장해달라고 해. 백장미가 반, 붉은 장미가 반이다, 명심해.

그러자 동생은 다음 질문으로 위액을 역류시켰다. 내 여자 친구는 꽃 별로 안 좋아한다 하던데? 나는 사자후 같은 울림으로 소리쳤다. 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어! 동생이 고막이 나간 것 같다고 불평했지만 나는 엄준히, 그럼 다른 쪽 귀로 통화하라고 했다. 꽃을 산 다음 제과점으로 가라. 케이크를 가장 예쁘게 만드는 곳으로. 케이크를 가장 예쁘게 만드는 곳에선 수제 초콜릿도 예쁘게 만들어. 화이트데이에 사탕을 사는 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 저지르는 실수다. 초콜릿을 사! 수제로! 포장해! 그리고!

그리고? 동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비장하게 이 사과 절차의 오메가를 지시했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200자로 늘여 쓰고, '미안하다'라는 말을 300자로 늘여 쓴 카드나 편지를 꽃다발에 끼워 넣어라. 동생은 수화기가 촉촉이 젖도록 긴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평소에 국어 공부를 단디 하는 긴데. 작가의 동생이 글쓰기 무지랭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건 고통스러웠으나 구성과 표현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은 해야 했다.

동생은 끝까지 이 모든 성의의 근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만나서 열심히 미안하다카면 되는 거 아이가. 꽃하고 초콜릿 사면 되지 편지까지 필요하나? 나는 짧은 신음을 토했다. 아, 이 미물은 사과가 뭔지 모르는구나. 나는 간신히 에너지를 쥐어짜 인내심을 발휘했다. 너는 '열심히 미안하다고 한다'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거다. 굽신굽신하고 허리 좀 숙인다고 성의가 엿보이나? 잘못을 당한 사람 입장에선 네 무릎보다 더 싸게 보이는 게 없을 거다. 사과란 건, 네가 잘할 수 없는 일을 해냈을 때야말로 성의가 보이는 거야. 비굴하게 군다고 다 사과냐?

동생은 끝까지 이런 성의의 가치를 당최 받아들이지 못했고, 어쨌든 화훼단지에 꽃은 사러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꽃다발을 들고 머리를 숙이는 동생을 상상했다. 꽃을 제가 키운 것도 아닌데 성의는 무슨.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가만, 이 성의 없는 비굴한 사과 동작, 뉴스에서 자주 본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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