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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2012쿠바, 가난과 낭만 /박형섭

쿠바인들 영혼 스민 라틴음악 속에서 새로운 혁명이 움트고 있는지도…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2-03-23 20:18:13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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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나라가 있었다. 아득한 땅,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 쿠바였다. 한때 라틴 음악을 즐겨 듣고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끼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다 체 게바라 이야기, 시가와 럼주, 관타나메라의 흥겨운 노랫가락을 듣기라도 하면 쿠바에 대한 몽상이 되살아나곤 했다. 그러다 지난달 문학기행을 겸한 멕시코·쿠바작가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 콜럼버스가 '지상 최대의 아름다운 섬'이라고 부른 쿠바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쿠바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거의 자정 무렵이었다. 짐을 찾고 세관을 통과하는 등 입국수속을 끝내니 어느 새 새벽 두 시가 넘었다. 시설이 노후한 공항의 모든 시스템이 느렸다. 현대적 삶의 상징이랄 수 있는 커피숍이나 편의점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차도는 협소했고 가로등이 없는 것인지 소등한 것인지 사방이 캄캄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며칠간 머물 숙소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고 욕실에는 녹물이 흘렀다. 쿠바에 대한 환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방문지에 대한 첫 인상은 느림과 가난이었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았다. 눈을 떠보니 태양이 창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을 보자, 간밤의 우려와 피곤이 말끔히 사라졌다. 바닷가 근처 녹지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낮은 집들이 아늑하고 마냥 평화롭게 보였다. 주변의 이국적 풍경도 눈길을 끌었다. 바다로 통하는 운하에는 요트들이 정박해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유쾌한 웃음과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불현듯 굶주림으로 쿠바를 탈출했던 보트피플과 요트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일상이 궁금했다. 그들의 삶은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풍경만큼 평온하고 아름다운 모습일까. 아니면 오랜 공산체제에서 궁핍과 독재에 신음하는 피폐한 모습일까. 호텔 레스토랑에서 오믈렛과 바비큐를 굽는 전형적인 쿠바 남자를 만났다. 그는 라틴 특유의 경쾌한 몸짓으로 일했지만 차림새나 얼굴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따금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서툰 영어로 오믈렛 혹은 바비큐라고 묻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침식사는 서양식 뷔페였지만 식단은 소박하고 단출했다. 식당 밖 로비에 덩그러니 낡은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었다. 그 주변에서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우수와 애잔함이 묻어났다.

아바나의 올드 타운은 스페인의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바로크, 로코코 풍의 고색창연한 건물들은 바르셀로나의 뒷골목을 연상시켰다. 성당과 광장, 인근의 카페와 레스토랑의 관광객들, 거리의 노래와 음악들은 자유와 풍요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쇼핑센터는 물론 일용품을 살 수 있는 상점들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오래된 고고학적 도시도 신구문화가 적당히 어우러져 있는 법인데 이 도시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순간 시간이 정체된 상태로 있는 것 같았다. 건물도, 시설도, 물건도 모든 것이 낡고 오래된 것뿐이었다. 그 가운데 유독 자동차가 그랬다. 쿠바는 지구촌 어디에도 볼 수 없는 살아 있는 자동차전시장이 되었다. 지난 시대의 향수에 젖은 관광객들은 화려하게 단장한 형형색색의 올드카를 타고 시내 투어를 즐긴다. 쿠바의 도시들은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궁핍이 오히려 보존과 절약의 미덕을 낳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쿠바인들은 비극을 코미디로 승화시키는 낙천적 기질을 타고났다. 그들은 속도 경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림의 여유를 즐긴다. 집이 비좁고 더우면 거리나 공원으로 나왔다. 그것이 말레콘 해변 산책로에 사람들이 붐비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혁명으로 얻은 자유와 낭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대부분 현 체제에 반항하기 보다는 순응하는 듯하다. 그러나 역동적인 젊은이들 사이에서 조금씩 평등주의의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회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점증하고 있다. 쿠바의 어느 시인이 말한다. "예술가에게 낡은 시간 속의 쿠바는 태양빛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땅이지만, 거리의 시민은 더는 가난한 평등사회를 유토피아로 믿지 않는다." 쿠바의 영혼이 스며있는 음악 속에서 새로운 혁명이 움트고 있는지 모른다.

부산대 불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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