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영 중인 TV드라마 '오작교 형제들'에 '국수'라는 초등학생이 등장한다. 집안의 장남이 필리핀에 체류하던 중 현지 여성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이 아이가 한국에 와 학교에서 서툰 한국말로 급우들에게 인사를 한다. "내 얼굴이 까무잡잡하지만 나도 너희와 똑같은 한국인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잘 부탁해." 

국수의 인사말에는 따돌림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나 폭력은 핑계만 다를 뿐 근원은 똑같다. 당하는 아이들은 "내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하고, 말을 잘 못하지만 나도 너희와 똑같은 학생이야"라고 가슴으로 외친다. 그런데 어른들은 두 얼굴이다. 내 아이가 당할 때에만 심각한 사회문제다. 그게 아니면 '그런 일이 있는가 보다'다. 내 아이가 가해자나 동조자일 때에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더 큰 문제는 학교가 골치 아픈 왕따나 폭력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거다.

자살한 대구 중학생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어도 자살의 유혹에 시달리는 아이는 부지기수다. 우리나라 초·중·고생 720만 명 가운데 4%인 30만 명이 왕따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수도권 중·고생 48%가 최근 1년 새 학교폭력을 경험했고, 42%는 최근 1주일 사이 자살유혹을 느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가장 큰 책임은 학교장과 교사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무관심과 침묵 속에 총체적 비극이 똬리를 틀고 있다. 교육 당국에 묻고 싶다. 학교폭력이나 왕따를 보고도 왜 별일 아닌 것으로 덮으려 하는지. 문제를 드러내어 고칠 생각은 왜 않는지. 약자를 괴롭히는 건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려는 비열한 행동이라고 왜 엄하게 꾸짖지 못하는지. 피해자는 도망가듯 전학 가는데, 가해자는 왜 학교에 그대로 두는지.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어서 강제전학 조치를 못한다면 왜 제도 개선을 건의하지 않는 건지. 왜 핑계만 대는지. 피해 학생이 끝내 목숨을 버려야만 뭔가 시늉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모를 일이다.

학부모의 무관심도 도를 넘었다. 학부모 명찰을 단 사람이라면 자문해볼 게 있다. 아이들에게 남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지는 않았는지. 때리면 때렸지 맞고 오지 말라고 하진 않았는지. 내 아이가 다른 아이를 괴롭혔다 해도 '장난으로 그런 걸 무슨 대수'라고 하며 비호한 적은 없는지. 내 아이가 선생님한테 몇 대 맞았다고 당장 달려가 '선생' 멱살을 잡으리라  호들갑 떤 적은 없는지. 나 역시 과거 무관심했던 부끄러운 아빠였다. 내 아이가 맞지 않으면 그만이었으니깐.

왕따나 폭력에 침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느 대학교수가 초등생 딸에게 끊임없이 욕설 문자를 보내는 남자 아이를 학교로 찾아가 폭행한 사건이 이런 경우다. 논란이 일자 이 교수는 최근 교수직을 사퇴했다. 학교에 이야기했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어 직접 실력 행사에 나선 게 화근이었다. 며칠 전 미국에선 또래들의 집단괴롭힘에 시달리던 15세 소년이 가해 학생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가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야 하는 건가'라는 논란이 일고 있지만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마틴 니묄러는 나치 치하에서 소수의 피해에 눈감은 다수의 침묵을 고백 형식으로 질타했다. "처음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지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엔 노동운동가를, 그 다음엔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노동운동가도, 유대인도 아니었기에 역시 침묵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다. 하지만 나를 위해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른바 '니묄러의  고백'이다. 남의 불행과 시련에 대한 무관심이 결국 자신의 불행과 시련으로 돌아온다는 상징적 이야기다. 고백 중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내가 아니므로 가만히 있었다'가 아닐까. 그가 일깨운 건 연대의식이다. 소수의 피해에 침묵하면 결국 전체가 당한다. 학교, 가정, 사회가 뭉치지 않으면 해법은 없다. 누구보다 교사가 앞장서야 한다. 현장에서 폭력을 꺾을 사람은 교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