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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발효하는 삶 /배유안

잘 익은 김치처럼 우리 인생도, 글도 적당히 곰삭아야…내년 더 발효되자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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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1-12-23 20:24:17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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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했느냐는 인사가 한동안 오갔다. 이집 저집 김장 맛을 보는 재미도 누렸다. 서양음식의 침투와 외식문화의 범람에도 이맘때면 김장이라는 축제를 통해 세력을 과시하는 김치가 신기하고 고맙다. 가벼운 김장을 끝내고 난 어느 날, 유기농으로 키웠다는 알찬 배추 한 자루가 생겼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들기에도 무겁게 속이 튼실한 배추에 입이 벌어져 쌈배추용으로 한 통 남기고 나머지는 굵은 소금을 물에 풀어 절였다. 내년까지 쓰겠다며 냉동실에 갈무리해 둔 붉은 고추를 넉넉히 갈아 넣고 국물이 잘박잘박한 반김치를 담갔더니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내 손맛도 제법이다 싶어 은근히 신이 난 나는 여기저기 자랑질에 신맛을 내는 미생물 이름이 뭐라더라, 하며 기억날 리 없는 길고 어려운 미생물과 효소 이름까지 거들먹거리는 치기를 부렸다.

김치 맛 속에는 서른 가지가 넘는 미생물 효소가 들어있다던가? 배추가 주재료이지만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각종 채소와 젓갈, 양념에서 각각 다른 미생물들이 활동을 하는 덕분에 발효 숙성된 김치는 깊고 시원한 맛에 감칠맛까지 난다. 게다가 그 맛들은 집집마다 사용하는 양념의 종류와 양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 시간 경과와 환경에 따라 또 다르다. 생각해 보면 발효의 유익함은 무심히 넘길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발효식품, 특히 다양한 김치 발효균단들의 위력이야 익히 아는 것이고, 최근에는 야생 약초 등으로 발효액을 만들어 마시는 사람들도 많다. 엊그제는 게으른 나도 각종 세제에 섞어 쓰겠다고 효소세제를 만들었다. 쌀뜨물을 모아 효소 원액을 넣어 발효 숙성시키는 간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발효가 샴푸, 보디제품, 세탁세제 등에 첨가되어 발휘하는 힘은 아주 크다고 한다.

발효, 참으로 멋들어진 단어 아닌가? 술을 술이게 하고, 장을 장이게 하고, 김치를 김치이게 하는 작용. 그 부산물에서 얻어지는 오묘한 풍미와 말로 다할 수 없는 약용 가치. 어쩌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것도 발효가 아닐까? 사실 발효란 단어는 내게 오래된, 각별한 의미가 있다. 나는 원래 자책이 많은 성격이었다. 인생에서 날마다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선택들은 참으로 힘겨웠고, 사람과의 관계 맺기는 또 왜 그리 어려운지. 부족한 분별력과 짧은 지혜를 자책하며 울증에 시달릴 때마다 나는 내 됨됨이가 언제쯤이면 잘 발효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의 서걱이는 생각과 행동거지에 발효라는 단어를 해결책으로 가져온 것을 보면 각종 발효균에 대한 지식은 얕아도 발효에 대한 매력은 일찌감치 알았던가 싶다.
어서 잘 발효되고 싶다는 내 말을 친구들은 제각각 이해했겠지만 내게는 인생의 목표점 같은 거였다. 마흔쯤이면 충분히 발효될 줄 알았던 게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우스운 일이지만, 사람은 마흔에 발효가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걸 한참 후에라도 알게 된 것이 나름대로 발효라면 발효였다. 더는 소모성 자책은 하지 않게 되었고 나에게 너그러이 시간을 줄 줄 알게 되었으니까. 아쉬운 대로 내 인생의 미생물 하나가 왕성하게 활동해준 모양이었다. 이 덕분에 책을 쓰면서 부모와 어른들 때문에 속 아픈 아이들에게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얘들아, 어른들도 아직 미숙하단다. 용서해 다오." 며칠 전인가, 달리던 자동차끼리 부딪칠 뻔했는데 상대 쪽 운전자가 빵빵 한번 날리고 앞서 달려갔다. 돌아보면 10년 넘어 운전해 오면서 큰 사고 없었던 것이 다른 이들의 순발력과 판단력 덕분이었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알게 모르게 여러 사람들에게 빚진 게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하게 된 것도 어느 고마운 미생물 덕분일 것이다.

글을 쓸 때에는 더더욱 발효가 아쉽다. 새 글을 쓸 때마다 늘 처음처럼 힘이 드는데 아이디어와 글감이 아무리 그럴싸해도 내 안에서 곰삭아 주지 않으면 글이 되질 않는다. 내 안의 미생물이 잘 활동할 수 있게 내 상황을 조절하고 생각들이 발효되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한다. 그 괴로움 때문에 효소를 잔뜩 지닌 유익한 미생물 섭취에 게으르지 말 것을 다짐도 한다. 작품이 되지 못한 글 몇 개를 안고 있는 데다 이런저런 관계 맺기에 자꾸 서툴러지는 나는 올해도 송년회 자리에 가게 되면 또 작년처럼 잔을 채워 들고 말할 것이다. "내년엔 조금 더 발효되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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