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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시카고 브론즈빌 /전진성

삶의 향기 빠진 외관상 번듯함은 도시관광상품화의 해답이 될 수 없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6-23 21:18:01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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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같은 수평선을 지닌 미시간호 연안에 자리 잡은 시카고는 미국 3대 도시의 하나로 꼽힌다. '마천루'라는 단어가 바로 이곳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현대식 고층건물이 즐비하다. 그런데 화려한 도심에서 남쪽으로 단 몇 구역만 가면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왠지 허름하고 방문자의 지갑을 안주머니 깊숙이 숨어들게 만드는 그곳은 바로 '브론즈빌'이다.

시카고 남부의 브론즈빌은 '구릿빛 지역'이라는 명칭 그대로 미국 흑인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다. 뉴욕에 할렘이 있다면 시카고에는 브론즈빌이 있다. '대이민'의 시대인 1910, 20년대에 수많은 흑인이 남부 농장지대를 떠나 참된 자유와 직장을 찾아 북부의 공장 지대로 이주했다. 당시 시카고는 미시간 호반을 따라 도축업이 활발했으며 도시 남쪽 가장자리에는 미국 최대의 철강공장 단지가 들어서서 일자리가 많았기에 각지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이들의 정착 후 얼마 되지 않아 세계적 규모의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미시간 호반의 겨울만큼이나 매서운 실업의 한파가 찾아왔다. 그리하여 공장지대와 가까운 시카고 남부에는 일자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흑인들의 빈민가가 자리 잡게 되었다.

도시 안에 고립되어 존재하는 또 하나의 도시, 브론즈빌. 이곳은 미국인들 사이에 곧잘 '블랙 메트로폴리스'라는 별칭으로 불리어왔다. 어차피 검은 피부색으로는 온갖 인격모독과 폭행을 감수하지 않는 한 백인 거주지에서 버텨내기 힘들었으며, 주변에 흑인이 많아지면 백인 가정은 이사를 떠났다. 흑인 거주지가 점차 북쪽으로 확장되자 시카고의 백인 공무원들은 브론즈빌 안쪽에 일렬로 늘어선 대규모의 공공 주택을 지어 흑인들이 그들만의 지역에 살도록 조장했다.

또한 브론즈빌의 북부 가장자리, 즉 시카고 도심과 가장 가까운 구역에는 일종의 장벽처럼 일리노이 공과대학을 자리 잡게 했는데, 시카고에서 시작된 현대도시 특유의 고층 유리 건물은 바로 이 학교에서 첫선을 보였다. 독일 출신 현대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빛나는 이름과 결부된 현대 건축! 그것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냉혹한 장벽이었다. 미시간호의 푸른 수면을 가득 머금은 찬란한 유리 건물들에는 이 같은 비정함이 배어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표적인 흑인 정치 지도자들이 자라났다. 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마바도 이곳과 근접한 시카고 남부 지역에서 자신의 정치경력을 시작한 바 있다. 그러나 브론즈빌의 정수는 흑인 '재야' 세력에 있다. 1960년대 성난 파도처럼 들고 일어난 브론즈빌 주민들은 이곳을 찾은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마저 돌을 던졌다. 이 위대한 흑인 민권 운동가의 비폭력 노선이 성난 주민들에겐 그저 기득권에 빌붙는 비겁한 행태로 보였을 뿐이다. 이들의 분노는 이미 오래전에 소설가 리처드 라이트의 입을 통해 표출된 바 있었다. 그는 미군의 일원으로 독일 나치와 싸우던 흑인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는 또다시 타인의 자유를 위해서 싸울 셈인가? 우리 자신의 자유는 제쳐둔 채로?"

'블랙 메트로폴리스'의 이 같은 환경 속에서 특유의 문화가 자라났다. 브론즈빌은 전설적인 재즈와 블루스 연주자들의 천국이었다. 전국적 지명도를 자랑하던 '왕립 극장(리걸 시에터)'이나 '선셋 카페'에서 밤이면 밤마다 울려 퍼지던 듀크 앨링턴의 건반과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소리, 그리고 재기와 실력 면에서 이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던 수많은 유명, 무명 음악인들의 환희와 절규를 아는가? 브론즈빌은 또한 '흑인 미술운동'의 본거지로, 미술관을 벗어나 거리로 뛰쳐나온 공공미술의 산실이었다.
현재 시카고 시당국은 이 지역의 독특함에 주목하여 관광상품화를 노리고 있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너무 오래동안 바깥세계와 단절되어온 그곳은 그저 치안이 불안한 흑인 동네일 뿐, 더 이상 정치적, 문화적 활력이 남아있지 않다. 브론즈빌을 접하며 문득 '디자인 서울'과 '용산 참사'가 떠오른다. 과연 무엇이 한 도시를 살아 숨쉬게 만들며 방문자에게 감동을 안겨주는가? 주민들 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묻지마 식 고층건물, 삶 속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외관상의 번듯함은 해답이 아닌 듯싶다.

부산교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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