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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한국인의 철학' 정말 가능한가 /이택광

인문학 위기 만연, 우리만의 철학방법 못 찾았기 때문… 근본질문 되씹을 때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12-23 20:21:00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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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학술대회 참석차 들렀던 인도에서 한 흑인 철학자를 만났다. 그는 처음 철학을 공부할 무렵에 항상 들었던 의문에 대해 말했는데, 그 말이 내 폐부를 찔렀다. 그 의문은 "도대체 흑인이 철학을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질문은 그렇게 새삼스럽지 않았다. 처음에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유학길에 올랐을 때, 나를 괴롭혔던 화두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비서구인으로서 철학을 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끊임없이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후일 나에게 박사과정 진학 추천서를 써준 한 노교수는 솔직하게 "너 같은 비서구인 학생을 처음 만났다"는 말로 자신의 곤혹감을 표현했다. 차라리 속내를 감춰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이 노교수처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노교수의 말은 나에게 과연 비서구인에게 서구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되새겨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철학'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런 철학의 보편성은 결코 자명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철학의 기원은 밀레토스라는 그리스의 소도시에서 출발했지만 그 열매는 서구에서 거둬들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는 그 철학의 사유는 그리스의 철학을 서구가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러므로 그리스에서 서구로 이동한 철학의 '여행'에서 우리는 지정학의 경계를 초월한 '앎에 대한 사랑'이라는 철학적 사유의 동시성을 확인할 수 있다. 철학이 '앎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 사랑은 굳이 서양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나 유럽 백인이라는 인종에 국한할 수 있는 게 아닐 테다. 이런 근거에서 보편적 사유를 수행할 수 있는 흑인 철학자나 동양인 철학자의 가능성을 논증하는 게 타당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말에서 당장 흑인 철학자나 동양인 철학자의 사유와 언어가 서구 백인 철학자의 언어와 동일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건 다소 조급한 느낌이다. 동일성보다는 차이에서 우리는 흑인 철학자와 동양인 철학자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서구의 철학사는 흑인과 동양인이라는 타자의 영역을 배제하면서 지정학적 특수성을 위장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에 철학이 없다고 했던 하이데거의 언술은 동양인에 대한 폄하를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서구 철학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유럽 백인의 사유방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철학은 그리스에서 발원해서 서구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서구 철학'인 것이라는 생각은 보편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철학사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를 뜻한다. 이를 통해 새롭게 드러나는 건 서구철학사가 은폐하고 소거시킨 '타자'의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최근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안톤 빌헬름 아모라는 18세기 흑인 철학자의 존재는 지금까지 철학사에서 정전(正典)으로 받아들여졌던 '철학의 아버지들'에 대한 생각을 다시 가다듬게 만든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료들을 토대로 몇몇 학자들은 칸트의 세 가지 비판서가 흄을 겨냥한 게 아니라 아모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석학의 출현이 근대적 공간의 확장으로 인한 타자의 출현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그러나 서구 철학이 인정해온 이런 막연한 타자의 범주는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외부의 타자를 설정해놓고 내부는 순수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깔아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모라는 흑인 철학자의 존재는 서구 철학의 내부가 그렇게 순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아모는 서구 철학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칸트가 감춰놓은 사유의 기원이었다. 이 기원은 외부였다기보다 내부였고, 아모의 존재가 없었다면 지금의 칸트를 생각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운위하는 상황이 이제는 식상할 지경에 이른 한국이지만, 결국 이 위기상황은 우리의 언어로 우리를 설명해줄 철학을 여전히 발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불거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한국어로 철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곧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붙들고 해명해야 할 화두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겨야 할 것 같다.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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