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시론] 2000년대의 마지막 말 /이명원

강바닥에 수십조 쏟아부으면서도 대운하 포기한다고? 말의 타락 극에 달해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07-01 20:33:25
  •  |  본지 26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어제는 울화 때문에 아내가 잠든 후에 골똘하게 서재에서 술을 마셨다. 사실 술과 담배를 끊으리라 작정한 게 며칠 안 되었는데 그게 뜻대로 될 성싶지 않았다. 곧 태어날 아기 때문에라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담배와 술과 같은 아무래도 서민들이 더 찾기 쉬운 품목의 간접세를 인상하겠다는 이 정부의 고약한 생각도 이런 내 생각을 굳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술과 담배에의 유혹이란 것은 습관이 아니더라도 불가항력적인 끌림이 있는 듯하고, 나에게 그것은 우정과 관련할 때가 더욱 그렇다. 찬 오이소주를 들고 멀리서 찾아온 벗들과 마시며 세간에서 잊고 있었던 맑은 이야기를 할 때면 취기조차도 달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대학시절에 시를 쓰고자 했을 때는 시험 삼아 취한 친구들의 말을 수첩에 그대로 적어본 적이 있었다. 나중에 보니 문학평론가 김현이 '불꽃의 혀'라는 산문에서 상기시킨 바 있는 도취된 언어가 이상하게 수첩에는 가득 적혀 있었다.

취한 말을 듣고도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것은 취객들의 공동체에서 가능한 일이다. 취한 사람들은 자기 앞에 있는 더 취해 있는 사람들의 말이 널뛰기를 하건 아니면 자유낙하를 하건 다 알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소통이란 게 꼭 말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 말을 하는 상황과 제스처, 미묘한 표정과 침묵이라는 넓은 의미의 맥락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하지 않은 멀쩡한 정신의 사람이 취객의 언어를 알아듣기는 어렵다. 말이라고 하는 것 역시 술로 치자면 '도수'라는 것이 있는 것이어서, 같이 얼굴이 붉어지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고 겉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자고로 말이 통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어떤 흔쾌한 내면의 개방과 신뢰가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요즘 들어 말이 썩어빠진 낡은 가죽처럼 텁텁하고 냄새나는 것처럼 흉물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내 주변에 말깨나 한다는 사람들이나 말깨나 경청한다는 사람, 말깨나 세련되게 세공한다는 사람들의 중론이 그렇다. 후일 200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말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조사하는 이가 있다면, 참 말도 안 되는 시대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

1979년 3월에 출판사 뿌리깊은나무는 '칠십년대의 마지막 말'이라는 산문 엔솔로지를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의 편집자는 "앞으로 스무 해 쯤이 지나 이천년 대에 들어서면, 아마도 이십세기의 후반기 오십년 동안에 한국 땅에서 일어난 일들과 이루어진 일들을 묶어 현대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작업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렇다면 1970년대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라고 묻고 '산업화' '고도성장' '번영' '근대화' 등속의 말을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장도 삽입하고 있다. "한국, 1970년대, 그것은 물질과 정신의 두 상대 개념이 치열하게 맞선 십년이었습니다. 고도성장의 화려한 양달이 있었고 인간상실의 우울한 응달이 있었습니다. 또 국가번영의 뚜렷한 명제가 있었고, 그 뒤안길에서는 소리 없는 민중의 절규가 있었습니다."
이런 논법을 흉내 내어 2000년대를 특징짓는 마지막 말을 선정해 보면 어떨까. 아마도 "2000년대는 오직 물질 개념만이 횡행했습니다. 경제성장의 구호와 무관하게 민중들은 서로의 뺨을 때리거나 서로를 짓밟고서라도 살려고 절규했습니다. 고용주들은 공장을 폐쇄한다고 협박하면서 그런 싸움을 부추겼지요. 인간상실의 우울한 응달은 회복할 수 없이 깊어졌고, 위정자들은 어리석은 백성에게 말이란 사치품에 불과하다며 공론장을 폐쇄시키려 애썼습니다. 그런 자들이 취객의 언어를 말이랍시고 멀쩡한 국민에게 떠들어대니 울화가 깊어졌습니다."

나는 이런 문장이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어륀지' 운운하는 말장난을, '당선인' 운운하는 표현의 검열을, '소통' 운운하는 거짓말을 아주 당연시했던 집단이기 때문이다. 수십조의 돈을 강바닥에 쏟아 부으면서, 다른 입으로 이제 대운하는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행태의 반복은 말과 사물, 말과 사람, 말과 진리의 개념을 타락시키는 일의 한 명백한 상징이다. 말의 타락이 극에 이르렀다.

문학평론가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건강한 부산을 위한 시민행동 프로젝트
많이 본 뉴스 RSS
  •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민홍철 국방위원회 민주당 간사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이채익 행안위 한국당 간사
강동수의 세설사설 [전체보기]
‘한반도 비핵화’ 탈출로 찾아내야 할 평양 정상회담
어른들은 모르는 방탄소년단의 ‘방탄’세상
강동진 칼럼 [전체보기]
활력이 넘치는 교토의 특별한 비밀
부산에 누워 있는 에펠탑이 있습니다
기고 [전체보기]
‘Going Together’ 캠페인으로 선진 정치문화를 /이대규
리차드 위트컴 장군과 세계시민정신 /강석환
기자수첩 [전체보기]
‘김지영 논란’ 유감 /이승륜
한국당 부산의원, 더 반성해야 /정옥재
김용석 칼럼 [전체보기]
생활 SOC: 천사도 디테일에 있다
한여름의 몽상: 부산의 다리들이 가리키는 ‘길’
김정현 칼럼 [전체보기]
‘미스터 션샤인’ 오해
통일 vs 평화공존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김경수·오거돈 선거공약 1호 운명은? /김희국
시, 독립투사 발굴 앞장서야 /유정환
도청도설 [전체보기]
폼페이오 추석 인사
백두에 선 남북 정상
문태준 칼럼 [전체보기]
고요한 물
폭서(暴暑)와 피서(避暑)
박무성 칼럼 [전체보기]
‘밥 한 공기 300원’의 미래
교육부가 만드는 ‘대학 살생부’
박창희 칼럼 [전체보기]
서부산 신도시,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설 [전체보기]
공급 확대로 선회한 주택정책, 지방은 뭔가
법원행정처 폐지 사법부 개혁의 시작일 뿐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국민연금 개혁, 공론조사가 필요하다
지금 ‘복지국가 뉴딜’이 필요하다
장재건 칼럼 [전체보기]
미친 집값과 서울 황폐화론
포스트 노회찬, 정의당만의 몫일까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