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마리의 말이 바닷바람을 가르며 뛰어다닌다.
‘두두두, 두두두두, 또각또각, 두두두….’
보통 말이 아니다. 달리는 속도가 워낙 빨라 그림자가 안보일 정도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절영마(絶影馬). 그 말이 뛰놀던 곳이 절영도(絶影馬), 바로 영도(影島)다.
영도가 옛날 ‘말의 섬’이었다는 것은 역사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후삼국 시대 패권을 다투던 왕건과 견훤의 쟁투 과정에서도 절영마가 등장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은 화평의 선물로 고려의 왕건에게 절영마 1필을 보내기로 한다. 이때 견훤의 책사들은 절영마를 왕건에게 보내면 후백제가 고려의 속국이 된다며 반대한다. 견훤은 왕건에게 말을 선물하려던 계획을 철회한다(KBS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이 왕건에게 말을 선물한 것으로 그려짐).
삼국사기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신라 성덕왕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에게 그동안 주위의 견제로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양으로 절영마 1필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절영마의 명성을 짐작케한다.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1800년대. 1867년부터 1874년까지 동래부사로 재임했던 정현덕(鄭顯德)이 지은 ‘봉래별곡(蓬萊別曲)’에도 절영마가 등장한다. ‘절영도(絶影島) 드러가니 수로(水路) 십리 적실하다/산하(山下)는 목장(牧場)되어 3천준마 용동(聳動)이라…’
영도는 이처럼 예로부터 명마의 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역대 왕조들은 영도의 목마장에서 말을 기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향토사학자들은 지금의 봉래동 로터리 인근 조흥은행 근처가 옛날 국마를 검사하던 ‘고리장(검마장)’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그 많던 말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향토사학자 김이곤(63)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조선말 고종때, 조선에 진출한 일인들이 땔감으로 사용할 영도 참나무 벌목허가권을 달라고 요청한다. 고종이 경상도 관찰사 윤자승에게 의견을 묻자 윤 감사는 ‘일인들에게 땔감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참에 영도에 있던 말을 모지포(지금의 사하구 감천동)로 옮기고 중리쪽에 토성을 쌓아 일인들이 얼씬도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영도의 많은 말들은 모지포 등지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말을 방목하던 곳은 태종대 앞 평지로 여겨진다”며 “영도가 목마장이 된 것은 말의 천적인 호랑이가 없었다는 사실도 감안됐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말의 섬’인 영도는 다양한 역사 변화의 스펙트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신석기시대 부산지역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았던 곳, 임진왜란 이후 무인도로 버려졌던 곳, 한때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하며 부산 인구의 3분의 1이 몰려살만큼 번창했던 곳, 남항·대평동 해안을 메워 육지로 만든 곳, 영도다리로 섬아닌 섬으로 바뀐 곳, 그리고 청학 봉래 영선 등 지명이 말하듯 ‘선인이 학을 타는 지세’를 갖췄다고 할만큼 사람살기 좋은 곳,….
영도의 남쪽에는 태종대가 버티고 있고, 북쪽에는 부산대교와 영도대교가 들어서 뭍과 연결되어 있다. 동쪽은 한진중공업 등 공장들이 들어선 반면 서쪽은 자연해안 그대로이다.
바로 이곳 자연해안에 영도의 최신 명물 절영해안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지난 99년1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47억원의 예산과 연인원 12만여명이 투입돼 조성된 이 해안산책로는 영선동 반도보라아파트~중리해변(3㎞)까지 이어져 있다.
관리사무소를 지나 수리바위 낚시터까지 800여m의 산책로. 부산항 묘박지에 정박된 수많은 배들, 햇빛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벗삼아 걷노라면 영도 이야기를 축약한 ‘모자이크 벽화’를 만난다. 하나하나가 한국사이자 영도의 역사이다.
벽화의 처음은 동삼·영선동 패총이다. 한반도에서 5천~6천년전 시작된 신석기 문화는 바로 이곳 동삼동에서 유래한다. 영도 동삼동 조개무지(패총·사적 266호)는 흔들리지 않는 증거다. 이 조개무지는 남해안 일대에서 가장 큰 신석기문화 유적이다.
뒤이어 나타나는 벽화는 태종무열왕의 사냥 모습. 영도의 명소 태종대는 신라 태종무열왕이 군사들을 조련하며 사냥을 즐겼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엄밀한 의미의 태종대는 오늘날 영도 등대가 있는 남쪽 30곒쯤 떨어져 평평하게 바다로 향해 나란히 선 절벽을 말한다. 망부석이 외로운 오른쪽이 신선대(남구 용당동의 신선대와 이름이 같음), 왼쪽이 태종대다. 동삼동 감지해변의 ‘감지자갈’이란 지명은 태종무열왕때 절영마가 이곳 연못물을 마시고 병사들이 쉬었다해서 붙여졌다.
모자이크 벽화는 절영마와 임진왜란 때의 부산포 해전, 그리고 상판이 들린 영도다리 등으로 이어진다.
벽화에서 눈을 돌리면 남항 어촌계 해녀 탈의실이다. 이곳 바닷가엔 초로의 해녀들이 해삼 따위를 놓고 손님을 부르고 있다. 해녀들은 옛날 영도에 부임한 관리들을 울렸던 영도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옛 관리들은 처음엔 섬으로 들어오기 싫어서 울고, 임기가 끝나면 정 때문에 뭍으로 나가기 싫어서 울었다는 것.
“한 접시 해 보이소.” 어른 중지만한 해삼 10여마리와 음료수 1병을 끼워 5천원에 팔고 있는 해녀들의 그을린 얼굴 위로 해질녘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 정상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