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문학의 시대가 저물었고, 인문학은 효용이 없다고 하지만 여전히 해마다 신춘문예 공고가 올라온다. 누군가가 밤잠을 설쳐가며 시를 고치고 있을 터. 흥미롭게도 올해는 20·30대 사이에서 시집이 ‘텍스트 힙’을 상징하는 요소로 읽혔다. 도시의 감각과 잘 맞아떨어지는 짧은 문장들, 문고판의 가벼운 무게, SNS에서 빠르게 공유되는 구절 덕분인지 서울에서는 시를 매개로 한 모임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소규모 창작 스터디부터 낭독회, 감성 매거진 계정의 큐레이션, 매거진 인기에 힘입어 열린 팝업 행사까지. 수도권의 여러 장소에서 시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는 다채롭게 확장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이 오히려 사람이 직접 쓴 문장의 ‘진심’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체감되는 것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신문사 중심의 등단 구조가 낡았다는 비판이 있었고, 특정 학교와 인맥 중심의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지역 창작자들에게는 이런 비판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지역에서는 접근할 통로 자체가 희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기적인 시 창작 모임도 드물고 출판 기반도 얇다. 창작 의지가 있어도 함께 뜻을 도모할 동료들끼리 만남의 장을 가지기도 쉽지 않다. 지역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마치 거울 없이 옷을 고르는 일처럼 막막하다. 결국 ‘문단이 낡았다’보다 ‘문단에 닿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게 지역문학의 현실이다.
이러한 단절감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필자는 올해 6월부터 부산에서 시 창작 모임 <시도>를 운영하고 있다. 20대부터 50대까지, 직업도 살아온 배경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느덧 13명이나 모였다. 어떤 이는 새로운 취미를 찾다가 문학의 세계로 들어왔고 어떤 이는 등단을 목표로 오랜 공백을 지나 다시 창작을 시작했다. 우리는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한자리에 모여 시인 선생님이 선정한 시를 함께 읽는다. 이어 각자 한 편씩 가져온 자작시를 낭독하며 서로의 문장을 지켜본다. 지역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이 아직은 거창한 담론을 세우는 일보다 같은 도시의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는 일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시를 읽고 쓰고 듣고 받아 적는 이 단순한 반복이야말로 지역 문학의 숨을 잇는 가장 구체적 방식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목요일 저녁의 느린 리듬 속에서 시 한 편이 다양한 감각에 부딪히며 조금씩 형태를 갖추는 동안 배운 점은 결국 시를 읽는 태도가 곧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라는 점이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끝까지 들여다보고 마음이 닿은 표현에 밑줄을 그어보는 행위에서 ‘문장’과 ‘표현’에 ‘당신’을 넣으면 그것이 곧 공동체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지역에서 시를 읽는 일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 지역 문화 기반을 유지하는 최소 조건이기도 하다. 창작 모임과 독서 공동체가 지속될 때 비로소 지역 출판 생태계는 빛을 발한다. 신인 창작자가 성장할 토양 역시 자연스럽게 마련될 수 있다. 수도권에 집중된 문화 흐름 속에서 지역은 쉽게 배후지로 밀려나지만 지역 시민 스스로 읽고 토론하는 문학 활동이 이어질 때 지역 내부의 문화 자립도 역시 높아진다. 앞으로도 ‘지역에서 시 읽기’, ‘지역에서 문학하기’, ‘지역에서 예술하기’는 확대돼야 한다. 예술은 단순히 감상적 취미가 아니라, 지역 문화의 균형과 다양성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투자이며 공공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를 읽으며 서두르지 않는 일. 어떤 예술가의 결론부터 단정 짓지 않고 말의 표면 너머에서 은은히 새어 나오는 리듬을 듣는 일. 이들 활동이 꾸준히 우리의 일상에 스민다면 언어를 대하는 개개인의 몸가짐 역시 단정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12월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시인, 윤동주가 태어난 달이다. 짧은 생을 산 그가 남긴 내면의 목소리는 지금도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한 해의 끝에서 사람들은 성과를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기 바쁘다. 연말의 어느 하루 익숙한 풍경을 지나며 시 한 줄을 읽어보자.
크리스마스에 딸기 케이크를 먹었느냐는 질문을 하듯, “어제는 무슨 시를 읽었나요?”라고 자연스럽게 묻는 날이 오기를. 당신의 곁에도 당신을 돌보는 한 줄 시가 오래 맴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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