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문재인 정부는 초기 지지율이 80%를 넘나들었다. 그 여세로 2018년 3월 28일 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공약인 ‘연방정부에 버금가는 분권형 헌법’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역대 가장분권적인 헌법 개정안이었다. 전국 순회 공청회를 열기도 했다. 될 것 같았던 헌법 개정은 이후 소위 ‘조국사태’로 정국이 급변하면서 기회를 놓치고 만다. 국민이 만들어준 절호의 기회를 정치가 걷어 차버린 것이다. 정권의 정치력 부재 또한 큰 원인이었다.
“‘진짜 대한민국’을 만드는 헌법 개정”, 현 정부의 국정과제 1호다. 그러나 작금의 정국을 보면 국정과제 1호에 대한 논의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물론 위헌적 ‘12·3 비상계엄’ 후 정국의 안정과 대미 관세 협상 등으로 개헌 논의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은 것도 이유일 터이다. 그렇지만, 국정감사에서조차 사라진 개헌 논의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현 정부는 과연 개헌에 의욕이 있는 것일까, 더욱이 그것이 지방분권형 개헌이라면 정부의 역할과 양보가 중요한데 과연 이에 대한 비전과 의욕은 있는 것일까’라는 걱정과 불안이 커져간다.
우리는 현행 헌법이 제정된 1987년 이후 여러 차례 개헌을 시도했다. 그러나 항상 정치권의 합의 실패와 지역 간의 분절 그리고 지나친 쟁점의 확대로 좌초되었다. 그 와중에 인구 격감으로 인한 지역 소멸,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청년층의 지방 이탈은 더욱 가중되었다. 제4차 산업혁명이니, AI 혁명이니 하지만, 현재의 지역 여건으로서는 이러한 세계사적 조류를 따라갈 역량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제기되는 것이 지방분권형 헌법 개정이다.
지방분권형 개헌은 단순한 헌법 조항의 수정이 아니다. 국가의 운영 패러다임을 중앙 집권에서 분권과 협치로 전환하는 구조 개혁이다. 중앙의 권력 구조를 보완하지 않고서는 실질적 분권은 불가능하고, 반대로 지방분권 없이 권력구조만 손보는 개헌은 공허하다. 따라서 이번 개헌은 권력구조 개혁과 지방분권을 결합한 형태의 개헌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 두 축이 동시에 작동할 때만 국민적 합의와 정치적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정부가 말하는 대통령 권한의 분산 역시 지방분권형 개헌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분권형 개헌이야말로 정부가 공약으로 내건 대통령 권한과 책임의 분산이다. 이 점에서 분권과 대통령제의 개혁은 맥을 같이 한다.
과거 개헌의 실패는 ‘모두를 바꾸려는 욕심’에서 비롯됐다. 헌법 전반을 손보려고 하면 이해 관계가 충돌하고 논의는 복잡해진다. 과거 성평등을 내세운 기본권 조항의 개정 문제로, 개신교의 큰 반대가 있었다.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것이었는데 실제 중요한 분권이나 권력 구조의 논의가 현장에서는 사라지고 말초적 이슈만 난무하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번 개헌 쟁점은 간단명료해야 한다. 정권의 관심사인 대통령의 중임 여부와 결선투표에 관한 사항과 분권 조항을 결합하여 하나의 쟁점으로 묶는 원포인트 형식의 개헌이 필요하다. 나머지 쟁점은 법률로 위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헌법에는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의 원칙’을 명시하되, 구체적 권한 배분은 지방자치법 등 후속 입법에서 정하는 방식이다. 이는 독일의 연방헌법이 채택하고 있는 합리적 분권 모델과 궤를 같이한다. 헌법은 큰 틀의 원칙을 정하고, 세부 조정은 중앙과 지방이 협의로 풀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 설계만큼 중요한 것은 지방의 단일 목소리다. 지금까지의 개헌 논의는 지역 간 심지어 지역 내부에서도 이해가 엇갈려 힘을 잃었다. 지방분권이 성공하려면 권역별로 공통의 요구를 도출하고,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연대해야 한다. 영남 호남 충청 등 각 권역이 협력해 ‘하나의 지방분권 개헌안’을 제시할 때 비로소 중앙정치는 움직인다. 만약 지방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면 지방분권형 헌법 개헌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분권 내용 또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단순히 사무 몇 가지를 지방으로 이양하는 수준을 넘어, 4차 산업혁명과 AI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권한을 지방에 부여하는 조항이 필요하다. 실질적 권한이 지역에 보장되면 지역은 중앙의 ‘보조 단위’가 아니라 지역 특성과 산업 구조에 맞는 정책을 설계할 수 있다.
예컨대 부산은 해양도시의 특성을 살려 해양물류·수소에너지 산업을 육성하고, 경남은 제조 혁신과 우주항공 산업을, 울산은 AI 기반의 친환경 산업으로 특화할 수 있다. 지역이 경쟁력을 갖춘 산업 생태계를 스스로 구축할 때, 국가 전체의 균형 발전도 현실이 된다.
개헌 최적기는 내년 6월 지방선거이다. 그렇게 긴 시간이 남지 않았다. 지방선거 이후엔 사실상 개헌의 시간은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국정과제 1호에 대한 시간, 분권형 헌법 개정의 시간이 조속히 도래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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