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만나는 청년들의 가장 흔한 고민은 직장 관련 스트레스다. 그들이 늘 하는 말이 ‘어쩔 수가 없다’이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또한 ‘어쩔 수 없는’ 고용 불안에 놓인 가장의 생존 압박을 그렸다. 잔혹한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의 원래 제목은 ‘모가지’였다. 청년 직장인에게 넥타이는 현실적으로 안전벨트로 작용한다. 청년 연령 상한을 39세로 상향하자는 논의가 활발한 지금, 과연 청년들은 어쩔 수가 없는가?
꿈 많던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스펙을 쌓고 난 뒤에는 생계형 직장인이 된다.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은 교사나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가르치는 일의 보람이나 공동체에 봉사하려는 마음을 들은 적은 거의 없다. 다만 안정적인 직업이어서 원한다. 나는 그들이 너무 빨리 경제적 필요에 굴복하지 않길 바란다. 이것은 현실성이 결여된 이상을 말하는 것도, 신념을 좇아 학교를 중퇴한 서태지나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을 미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굳게 믿는 안정적인 직업이 과연 안정적일까? 하는 물음이다.
청년들은 붕어빵 찍어내듯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경로를 가지고 닮은 꼴 인생을 꿈꾼다. 남들이 안정적이라 말하는 고정관념의 길, 고정관념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좀 더 수월하게 인생을 살고픈 마음을 누가 함부로 판단할까. 다만 안전하다고 믿는 길이 위험한 암초투성이라면? 안전하게 조건을 맞춘 상대만 골라 결혼했지만 사소한 위기로 한 번에 무너지는 부부의 세계를 자주 목격했다.
우리는 창의성을 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모두가 똑같이 달려가는 직장이, 대로가 아니라 레드오션의 병목구간이면 어떡할까? 경쟁력이란 말은, 레드오션의 링으로 덜덜 떨며 오르는 선수의 각박한 표현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자신만의 차별화된 스토리를 만들지 못한다면 설사 원하던 직장에 취업해도 버티기 힘들다. “요즘 직장 생활 어때?”란 질문에 “행복해 죽겠어”라고 답하는 직장인을 본 일이 없다. 기본적으로 직장은 낭만적인 데가 아니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곳이다. 그만둘 수도 없고 버티기도 힘들다면, 월급을 합의금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한 달 동안 에너지를 빼가고 힘들게 했으니 미안하다고 주는 합의금. 그러니 사소한 걸로 트집 잡혀도 자신의 자존심과 연관 지어서 상처받을 필요가 없다. 직장은 직장일 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시키는 일을 할 뿐 더 이상의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밖으로 떠나 있는 내면적 자기 퇴직 상태, 코인 등락에 신경 쓰고 퇴근 이후의 생활이 의미를 갖는다. 직장에서의 시간을 즐기지 못하면 하루의 대부분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다. 나는 청년들이 직장과 직업을 구분했으면 좋겠다. 직장에 충성할 필요가 없지만, 자신의 직업에는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 여전히 직업에서는 자아실현의 꿈을 꾸고 보람을 느끼며 가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 직장을 떠나야 하는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이다. 준비 없이 나가면 세상 밖은 생각보다 더 춥다. 그럼에도 떠날 이유가 분명하다면, 그만둘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동물의 왕국’ 같은 콘텐츠에는 종종 포식자의 사냥 장면이 등장한다. 사냥의 대부분은 실패의 기록이다. 조금만 더 애쓰면 성공할 것 같은데 포기하고 돌아선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힘이 빠졌을 때 상위 포식자가 등장하면 죽기 때문이다. 그만둔다고 인생에서 실패한 것도, 다른 데 가서 실패할 것도 아니다. 아닌 게 분명하다면 힘을 소진할 필요가 없다. 그만두는 것도 용기다.
일과 자신의 인생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면 둘 다 버리지 말라 말하고 싶다.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위해 취미를 줄이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일과 자신의 인생은 분리되지도 않고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일은 깨어있는 시간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삶이고, 일에 모든 것을 건다면 인생에서 직장을 뺀 소중한 가치가 훼손된다. 그때그때 밸런스 조절을 조화롭게 하면 어떨까.
청년의 강점은 자신을 수많은 우연한 사건에 던질 수 있는 용기이며 그 사건이 때론 위대한 각성으로 이어진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지도 검색으로 길을 잃는 게 불가능한 시대에 어째서 사람들은 더 자주 길을 잃는가. 남들이 원하는 방향이 정답은 아니다. 의식적으로 길을 잃는 훈련과 우연한 사건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으면 어떨까. 청년들이 너무 빨리 생계형 직장인으로 길들여지거나, 젊은 늙은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늙는다는 건 나이가 아니라 영혼이 죽어가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