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정론지를 표방 해온 A 신문. 지난 6일 자에 한국을 찾은 미국 청년 정치 운동가 인터뷰를 실었다. 그는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의 일등 공신으로 꼽혀온 인물. 무엇보다 정치를 외면해 온 젊은이들을 보수 지지로 이끌었다. “분노만으로 유권자를 움직일 수 없다. 맹목적인 팬덤 정치만으로도 선거를 이기지 못한다. 우리가 다가가야 한다.” 그가 밝힌 승리 요인이다. 사흘 뒤 A 신문에 ‘투쟁만으로 이기지 못한다’는 전 주필의 칼럼이 실렸다. 앞선 인터뷰 내용을 인용, 국민의힘에 이렇게 충고했다. ‘여당을 향해 독하게 싸워서 얻을게’ 아니라 ‘국민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라고 했다. 졸지에 그는 한국 보수 정당의 지향점이라도 된 듯한 모양새가 됐다. 반면 진보 세력을 대변해 온 B 신문. 8일 자에 ‘한국판 마가, 미 극우 동원해 부정선거 음모론 퍼트려’라는 기사를 실었다. 직전 주말 열린 보수 기독교 행사 ‘빌드업코리아 2025’를 심층 보도한 내용이었다. 주요 연사 중 한 명이 바로 A 신문이 인터뷰했던 그였다. 그가 주목받았던 이유는 ‘미국 역할론’을 암시했기 때문. 한국 특검의 교회 압수 수색을 비판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중들은 열성적으로 반응했다. ‘윤 어게인’ 등의 구호를 적은 옷과 모자를 착용한 청년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에스에이’ 떼창과 함께 일부는 눈물을 흘렸다.

한국에서 아주 상반된 평가를 받은 주인공은 찰리 커크다. 공교롭게도 미국에 돌아가자마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지난 10일 유타주 한 대학 행사에서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것. 32세 젊은 가장이자, 보수 투사의 죽음에 트럼프는 격분했다. “우리는 극좌 미치광이들을 상대하고 있다.” 사건 배후로 좌파를 지목하며 대대적 공세에 나섰다. 그의 죽음을 조롱한 사람들이 수사 대상이 됐다. 진보 진영이 발끈했다. 보수의 공격을 ‘마녀사냥’으로 규정, 맞대응에 나선 것. 민주당 출신 오바마 전 대통령이 먼저 트럼프를 직격했다. “정적들을 해충이라고 비하하는 것이야말로 해결해야 할 미국의 문제다.” 물론 “살해는 끔찍한 비극”이라며 정치 폭력엔 선을 그었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를 ‘유사 독재체제’에 비유, 민주당 당원들에게 더 강해질걸 촉구했다. 오래전부터 서서히 진행된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 커크 피살을 계기로 위험 수위로 치닫는 느낌이다.

우리 정치권에도 비슷한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9일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국회 연설. “노상원 수첩이 현실로 성공했더라면 이재명 대통령도 저 정청래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 대표가 12·3 비상계엄의 섬뜩한 계획을 개탄했다. 이때 의석에서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았을걸…”. 주인공은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 정말 믿기지 않았다. ‘대여 협상 대표가 어떻게 이런 말을…’. 그보다 이어진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진짜 그렇게 바랐던 건 아닐까.’ 송언석은 즉각 해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비난이 쏟아지자 같은 당 김재원 최고위원이 거들고 나섰다. “전 국민 41%를 끌어 묻어버리겠다는 (민주당) 당신들. 그런 언행에 치를 떨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제발 그리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송언석) 한두 사람(뿐)이겠나.” 당연히 더 큰 비판을 자초했다. 하지만 김재원이 소환한 민주당 인사 발언도 섬뜩하긴 마찬가지. 당시 교육연수원장이었던 최강욱 전 의원은 한 공개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2번 국민의힘 찍은 ‘2찍’을) 한날한시에 싹 모아다가 묻어버리면 세상에는 2번을 안 찍은 사람만 남으니까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완전히 성공하고 한 단계 도약하지 않겠나.” 최강욱은 당직에서 물러나고 당원권 정지를 당했다. 송언석도 마지못한 듯 1주일 뒤 ‘두루뭉술’ 유감을 표했다. 그렇다고 상대를 겨냥한 적개심이 모두 사라졌을까. 미국처럼 총을 들지 않았을 뿐, 살의를 띈 적대적(敵對的) 정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당장 여야 모두 초강성 유튜버에 휘둘려 당내 논쟁이 사라졌다. 이름하여 각각 ‘더불어김어준’과 ‘전한길의힘’으로 불리는 상황. 오직 초강수만 난무한다. 민주당은 대법원장 사퇴에 ‘올인’한 상태다. 급기야 확인도 안 된 의혹을 국회 ‘면책특권’을 앞세워 폭로했다. 삼권분립 위기론이 여기저기서 제기된다. “헌법 한번 읽어보시라.” 윤석열 탄핵 재판을 이끈 문형배 전 헌재 재판관의 당부다. 국민의힘은 이번 주 일요일 6년 만에 대규모 장외투쟁에 나선다. 명분은 ‘여권의 사법 장악 저지’다. 내심으론 ‘광장 정치’를 통한 아스팔트 우파와의 연대를 기대하는 눈치다. 이럴수록 민주당 강경파의 목소리는 커질 것이다. 그야말로 ‘적대적 공생’이다. 찰리 커크의 죽음이 유럽 극우에게 ‘복음’이 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정치가 양극으로 치달으면서 극단 세력의 숨통이 틘 탓이다. 우리 정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