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근사한 야경을 배경으로, K-팝 걸그룹이 춤과 노래로 악귀를 물리치는 독창적 퇴마 액션 서사.” 전세계 이목을 사로잡은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얘기다. 가장 한국적인 비주얼에 가장 글로벌한 서사. 무속과 도심, 걸그룹과 퇴마, 전통과 팝컬처가 충돌한다. 낯설고 강렬한 혼종. 이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플랫폼. 그리고 플랫폼을 움직이는 규칙, 알고리즘이다.
우리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문화적 승리의 정점에 서 있다. BTS가 빌보드를 접수하고, ‘오징어 게임’이 지구인의 밤을 점령했다. ‘K’는 더 이상 단순한 국가 상징 접두어가 아니다. 전세계가 열광하는 가장 힙한 문화적 기호이다.
하지만 이 화려한 성공은, 동시에 불편한 물음표를 남긴다. 이 무대는 누가 설계하고 디자인했나? 이 무대의 화려한 조명은 누가 켰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제작, 유통사가 각각 소니 픽처스, 넷플릭스라는 사실은, 그래서 날카로운 질문이 된다. 우리는 세계를 뒤흔드는 문화 개척자인가, 아니면 세계적인 플랫폼이 선택한 플레이어인가.
이 질문의 핵심에 ‘플랫폼’이 있다. 플랫폼은 단순한 유통 채널이 아니다. 플랫폼은 창작 구성의 생태계다. 그 생태계를 통제하는 알고리즘은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노출할지 결정한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출지, 어떤 이야기를 확산시키고, 어떤 감정을 소비시킬지, 콘텐츠의 내용 자체를 재설계한다. 창작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다. 주제 선택, 서사 구성, 감정 표현... 이제 창작은 시스템 바깥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이 창작 환경 그 자체가 된 거다.
그 생태계 안, 창작자가 시스템과 관계 맺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다. 맞고 틀림이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첫째, 튜너(Tuner). 시스템 최적화 기획가다. 튜너는 알고리즘을 적으로 보지 않는다. 명확하고 강력한 시장의 법칙으로 이해한다. 시청 시간, 클릭률, 이탈률 데이터는 창작을 구속하는 족쇄가 아니다. 성공으로 가는 확실한 나침반이다. 이들은 시스템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대중적 성공을 지향한다.
둘째, 해커(Hacker). 시스템 침투 전략가다. 해커는 플랫폼의 문법과 대중적 장르의 외피를 기꺼이 수용한다. 서사적 자율성을 일부 포기하는 대가로, 주류 시장 깊은 곳으로의 ‘접근권’을 획득한다. 트로이 목마처럼, 시스템이 허용한 형식의 심장부에 자신만의 메시지, 비판적 시각, 혹은 낯선 감각의 내러티브를 심는다. 해커는 시스템의 언어를 구사하여 시스템이 예측하지 못한 균열을 만들어낸다.
셋째, 빌더(Builder). 독립 생태계 구축가다. 빌더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가능성’에 방점을 찍는다. 이들은 플랫폼 알고리즘의 영향력을 거부한다. 독립 유통이나 팬덤 기반의 후원을 통해, 타협 없는 자신만의 서사를 추구한다. 빌더의 존재는 그 자체로 시스템의 바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다. 대안적 창작과 유통 모델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선구자 역할을 한다.
창작자는 이 세 가지 정체성 중 하나에 고정되지 않는다. 튜너로 시작해 자본을 모은 뒤 해커로서 새로운 도전을 하거나, 빌더의 이상을 좇다 자본의 벽에 부딪혀 튜너로 돌아오기도 한다. 맞다, 전략은 고정불변의 정체성이 아니다. 특정 조건과 목적 아래서 구사되는 유동적인 전술의 조합, 즉 유연한 전환 가능성이다.
낡은 신화 하나가 여기서 고개를 든다. “우리는 한국 고유의 순수한 서사를 지켜야 한다?” 게으른 말이다. 위험한 말이다. 문화는 언제나 혼종이다. 외부와의 충돌, 뒤섞임, 긴장 속에서 벼려지는 창조적 활력이다. 지금의 알고리즘은 그 혼종의 최신 버전일 뿐. 중요한 것은 순수성을 지키고, 오염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섞임을 견디고 감당할 수 있는, 그 뒤엉킴을 포용해 우리만의 스타일로 재구성해낼 수 있는, 주체적인 힘이다.
핵심은 세상과 관계하는 나의 시선과 생각에 대한 질문이다. 질문이 멈추는 순간, 창작은 계산이 되고, 예술은 최적화로 전락한다. 다행히도 튜너 해커 빌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해법을 찾는 K-창작자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이 빚어낼 K-컬처의 다음 페이지가, 그래서 더 기대된다.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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