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대통령 선거 공론장에서 실종된 ‘성평등’ 공약과 난무한 ‘여성혐오’ 발언을 지켜보며, 지난 3월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Adolescence, 2025)’이 떠올랐다. 영국은 모든 중학교에서 이 작품의 무료 방영을 추진한다고 밝힐 정도로 작품의 무게가 남다르다. 드라마는 13세 소년 제이미가 동급생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며 시작된다. 어느 평범한 아침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쳐 아들이 전날 저녁 친구 케이티를 흉기로 찌르는 증거 영상을 보여준다. 아버지 에디는 아들을 잘 알고 있다는 믿음, 괜찮은 아이로 키웠다는 생각, 부모로서 끝까지 지켜줘야 한다는 확신에 차 있다. 시청자들은 정말 이 평범한 아이가 살인범일까 궁금해하지만, 정작 드라마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치열하게 묻는다.

그리고 드라마는 말한다. 아이들의 범죄 ‘현장’은 오프라인이 아니라 온라인 공간에서 시작됐다고. 작품의 제목은 ‘소녀’가 아닌 ‘소년’의 시간이다. 부모들이 딸보다 아들의 성장에 더 불안을 느끼는 것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닌 듯하다. 소셜미디어는 현실에서 밀려났다고 좌절하는 소년들의 도피처가 되고 있다. 소년들에게 위로와 소속감을 부여하면서 혐오 표출과 극단주의를 조장하고 있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현실 세계가 남자아이들을 밀어내면서 공허한 아이를 끌어당긴 것이 소셜미디어라고 말한다. “만약 수십 명의 남성들이 여자아이들을 데려가 성관계를 시도하려는 일이 벌어지는 공원이 있다면 아무도 그곳에 자녀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현실 세계가 아니라 인스타그램 스냅챗 등 SNS에서 익명으로 보호받으며 버젓이 범죄가 자행된다. 조너선 하이트는 “부모가 현실 세계에서는 감시를 덜하고, 대신 가상 세계에서는 감시를 더 많이 해야 하지만, 거꾸로 영상 시청이나 SNS 사용은 방치하고 있다”고 강력히 경고한다.

한국에서도 ‘유해한 남성성’이 학생들 사이에서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2024년 딥페이크 성착취물 피의자로 검거된 10명 중 8명이 10대다. 성적 대상화와 모욕을 그저 ‘놀이’라고 생각할 뿐 왜 잘못인지 알지 못한다. 같은 반 친구나 교사의 외모 품평은 물론 성관계 하고 싶은 순위를 매기는 성희롱이 비일비재하다. 경기도 한 고등학교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말대꾸하지 않는다’는 ‘계집신조’ 피켓을 든 사진이 올라와 학교장이 사과했고 남학생들이 동물 행동학에서 무리 내 가장 높은 서열의 수컷을 지칭하는 알파메일(Alpha male)이 장래 희망이라고 버젓이 말하고 있다. 여자를 좋아하니 혐오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볼 뿐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기에 사안이 막중하다.

이런 상황에서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개 치던 혐오정치가 청년들의 일상 속 흔한 소통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소년의 시간’ 속 어른들이 청소년의 용어나 이모티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영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애자’ ‘제육’ ‘딸배’와 같이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혐오표현으로 쓰이고 있지만, 정작 어른들은 이 말이 혐오표현인지도 모른다. ‘나보다 약자’를 조롱하며 전능감을 얻는 혐오정치가 예전에는 부도덕한 표현으로 저지되었다면, 백래시가 전세계적으로 거세지면서 오히려 지지받고 있다. 여성혐오를 앞세운 스트롱맨들이 국가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남성성 위기론이 현실에서 득세하는 세태와 무관하지 않다. 사회가 혐오를 부추기고 다수가 방관하는 사이 ‘유해한 남성성’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드라마는 소년들의 SNS 사용 외에도 소년의 남성성이 만들어지는 과정, 청소년기 연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심리, 가해자 가족들의 삶을 비춘다. 하지만 이 비극적 사건의 원인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아이 자체의 기질과 더불어 가정 학교 또래 제도, 나아가 사회의 무관심과 포기가 중첩되어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덧붙여 아버지의 폭력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만으로 부모 역할을 다한 게 아님을 고통스럽게 직시하게 한다. 가족 간 소통 부재가 청소년의 고립과 문제 행동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균형잡힌 성인식과 성교육의 표류가 어떤 참담한 결말을 낳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디지털 세상은 단지 정보나 재미의 장이 아니라, 제이미가 왜곡된 남성성 우월감 수치심 복수심을 키운 사회적 인큐베이터다. 아이가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가 있다면 안전한가? 이 작품은 방 안이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더 잘 지켜봐야했어”라며 주인공 아버지가 흐느끼는 독백은 어떤 어른에게도 예외일 수 없는 고백이다.

누구도 혐오가 득세하는 세상을 원치 않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한다.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