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2027년 3월이어야 할 대선일이 1년 9개월 앞당겨진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는데 이번 선거전이 유난히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사람이 많다. 12·3 비상계엄 이후 장장 6개월간 이어진 대통령 탄핵 과정 전체가 하나의 패키지로 인식되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 3명 중 1명은 이미 사전투표를 마쳤다. 남은 건 3분의 2의 선택이다. 내일 아침이면 오늘과는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다.

계엄과 탄핵 그림자가 짙었던 초반에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보수 후보 총합보다 높은 50% 안팎의 지지율을 보이면서 일찌감치 승부가 결정되는 듯했으나,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와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도 뒷심을 발휘했다. 이준석 후보의 젓가락 발언, 유시민 작가의 김문수 후보 부인 폄하, 보수 댓글부대 의혹 등 여느 선거판과 마찬가지로 막판엔 네거티브 이슈까지 불거졌다. 하지만 이런 단기적인 폭로나 프레임에 휩쓸리면 우리는 또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3년 전 대선에서 ‘윤석열’을 찍었던 유권자 1640여만 명 중 상당수가 이 한마디를 기억할 것이다. 검찰은 바람이 불기도 전에 드러눕는 권력의 시녀인 줄 알았는데, 일개 검사가 직속 상관과 정권까지 들이받았으니 ‘강골 검사’ ‘대쪽 검사’라는 환호가 쏟아질 법했다. 그는 사법연수원 기수를 5단계나 뛰어넘어 서울중앙지검장으로, 검찰총장으로 파격 발탁됐고 급기야 대통령까지 거머쥐었다. 그러나 전매특허인양 내세우던 공정과 상식은 여지 없이 무너졌다.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먼저 짓밟았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던 문재인 정부는 또 어떤가. 보수정권 인사를 향해 적폐의 칼을 마구 휘두르며 의로운 척 했지만 실상은 인지부조화 그 자체였다.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살해당한 공무원을 아무 증거 없이 월북 시도로 몰아가는가 하면, 부동산 정책 실패를 숨기기 위해 통계 분식을 일삼았다. 밤낮 정의를 부르짖던 청와대수석 출신 장관은 자녀를 위해 입시 시스템 무력화를 시도했다. 문재인의 평등 공정 정의는 내로남불과 위선에 덮이고 말았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87체제의 산물인 제왕적 대통령제 폐단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대통령 선거가 미인대회 투표가 되어 버렸다고 한탄하는 이도 있다. 제 눈에 아름다운 사람을 뽑지 않고 여러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표를 주는 게 미인대회 투표의 속성이다. 강직함의 화신인 듯한 언사, 착해 보이는 얼굴에 속아 제 발등을 찍었다고 자책할 땐 이미 늦었다. 표를 얻기 위해 없는 죄는 만들고 있는 죄는 가려 버리는 정치꾼들, 삶의 일관성도 양식도 내던지고 한자리 얻겠다며 설쳐대는 부나비떼들이 일으킨 자욱한 먼지구름이 가라앉고 난 후엔 허탈함만 반복됐다. 차가운 물에 깜짝 놀라 뜨거운 물을 트는 ‘샤워실의 바보’와 무엇이 다른가.

이재명 후보는 일찌감치 대선전에 뛰어들어 전국 방방곡곡에 이것저것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를 대선 후보로 만든 행정가로서의 이력에는 ‘대장동’ ‘백현동’ ‘대북송금’ 같은 그늘이 어른거린다. 보수 진영에서 급부상한 김문수 후보도 마찬가지다.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 김 후보이지만 노동운동가에서 전향한 이후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이동해 극우와 연대한 전력을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준석 후보는 세대교체 이미지와 달리 ‘명태균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내린다.

한국은 G7 문턱에 서 있다. 80% 이상 구축된 국가 시스템이 100%를 향해 나아가느냐, 후퇴하느냐가 이번 대선에서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인 미국이 완성된 줄 알았던 체제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실증 사례다. 트럼프를 선택한 건 미국 유권자들이고 트럼프가 파괴할 세상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미국 유권자들 몫이다. 박근혜 탄핵의 반작용으로 문재인에 쏠린 것도,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감에 윤석열을 찍은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국민이다.

그래도 오늘 우리는 누군가를 골라야 한다. 이미 진영의 스피커가 된 미디어나 유튜브, 입으로는 공공선을 외치면서 한번도 공동체를 위해 희생해 본 적 없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일으킨 소음이 귀를 멀게 해도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고 그 선택에 책임져야 하는 게 민주주의다.

입으로는 무슨 말이든 하고 이미지도 포장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는 거짓말을 못한다. 누구도 자신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 교언영색(巧言令色) 허장성세(虛張聲勢)가 난무하는 이 목불인견(目不忍見) 한복판에서 후보들의 과거 행적을 한번쯤은 들춰보고 투표소에 들어가자.

강필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