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문정희 시인의 시가 스페인 산티아고 ‘말하는 돌의 정원’ 석비에 새겨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말하는 돌의 정원은 전 세계 언어와 문화를 기리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로, 나선형으로 놓인 돌 위에 각국가의 언어로 된 시를 새겨넣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18개국의 언어가 그곳에 새겨졌다. 사진만으로는 그 규모를 정확히 짐작할 수는 없으나, 석비 하나의 크기가 꼭 사람 한 명 앉기에 적당한 바위만 해 보였다.

하지만 전 세계의 언어를 다 기리기 위해선 바위가 놓인 정원이 아니라 수천 개의 자갈이 깔린 해안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언어정보 제공 사이트 에스놀로그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서 쓰이는 7000여 개 언어 중 40%가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100년 안에 전 세계 언어의 90%가 사라질 거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말하는 돌의 정원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김애란 소설가의 단편 ‘침묵의 미래’였다. 2012년 발표된 이 소설에는 ‘소수언어박물관’이 등장한다. 각 언어를 대표하는 최후의 생존자들, 모어(母語)가 통하는 대상이 더는 이 땅에 남아 있지 않아 어떤 말을 하든 공허하게 울릴 뿐인 ‘마지막 화자’들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인기 없는 전시실의 표본처럼 고독의 시간을 홀로 견뎌야 하는 한 노인은 바란다. ‘누군가 자기 말에 귀 기울이고 눈 맞춰준 뒤 (…) 너무 평범하고 친근해 눈물이 날 것 같은 모국어로 뭐라 대꾸해주길’.

지방소멸이 국가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지금, 남들이 모르는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가 소설 속 일만은 아닐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해진다. 지역의 인구가 줄면 지역의 언어도 사용 빈도가 줄어들고, 그 지역의 삶을 기억하는 이가 사라지면 그 지역의 문화 역시 소멸해 버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 아득한 고독이 나의 몫이 될 수도 있다.

제주 사투리를 제목으로 내세운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등장은 그래서 반가웠다. 내 고향이 제주인 걸 아는 지인들로부터 질문도 여러 번 받았다. “폭싹 속았수다 봤어? 울었어?” “근데 폭싹 속았수다가 무슨 뜻이야?” 드라마 보느라 눈물 콧물 쏙 뺐다는 증언이 속출하는 와중에도 정작 제목의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라고 답하면서 약간의 찜찜함과 의무감을 느끼기도 했다. 언어 속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정서가 깃들어 있어, “사과는 애플이야”처럼 간단명료하게 끝내버리기가 조심스럽다. A 언어와 B 언어 사이에 등호(=)를 긋는 순간 탈락되고 휘발되어 버리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같은 한국어를 쓰는 사이라 해도 부산 사람이 느끼는 ‘폭싹 속았수다’와 제주 사람이 느끼는 ‘폭싹 속았수다’는 결코 같을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폭싹 속았수다’는 정말 수고하신 분께 드리는 감사의 인사다. 시를 읽듯 나긋나긋 말하면 어색하다. 두 손을 꼭 붙든 채 고맙고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마음으로, ‘아이고 어떵허코, 폭싹 속았수다, 잘도 폭싹 속았수다양’이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야 어울리는 표현이다.

폭싹 속았수다의 경상도 버전 포스터가 나온다면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내가 생각한 후보는 ‘욕 봤데이’다. 시어머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이고 우리 며느리 욕 본데이. 욕 봤데이.” 내게 아직 ‘폭싹 속았수다’ 만큼 익숙한 말은 아니지만, 그 말에 담긴 마음의 온도를 다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그 말이 ‘폭싹 속았수다’ 만큼 애틋해질 거라는 걸 안다.

학창 시절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표준말 정의를 주관식 답안으로 달달 외우면서도 속으론 왠지 모르게 불쾌했더랬다. 우리에게는 서로를 외롭게 하지 않을 말, ‘너무 평범하고 친근해 눈물이 날 것 같은’ 말들이 필요하다.

이제는 표준어가 아닌 말들을 더 많이 듣고 발음해야 하지 않을까. 이게 내 교양이라는 듯이. 지역의 언어와 그 언어에 때처럼 묻은 삶의 흔적들을 어루만질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7000여 개의 몽돌이 다글다글 굴러다니는 해변에서, 몇 개의 돌이 날 향해 반짝인다. 잊지 말아 달라고. 기억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