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았지만 희망보다 우울과 분노가 교차한다. 국가 애도 기간은 끝났어도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마음은 끝나지 않는다. 나라가 이 판국이라니! 모처럼 만난 친지들은 정치적 선호 문제로 다툰다. 눈보라 몰아치는 광장에서 밤을 지새운 이들의 모습을 접한 오늘, 나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몸서리친다.

독감에 좋다는 생강차 타서 책상 앞에 앉는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은 난중일기 썼고 쿠바혁명 중에 체 게바라는 시를 창작하거나 필사했다. 괴로운 시절이어도 읽고 쓰면서 자신을 발견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많다. 기록하며 삶의 방향성을 모색하고, 읽으며 위로를 받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 나도 매일 한 줄이라도 쓴다. 일기든 편지든 빌려준 책의 목록이든 낙서든. 시를 쓰면서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점점 타인을 배우고 이해하게 되리라.

이 책상이 조금만 더 큼직하다면 좋은 글을 쓸 거라고 핑계 대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칼자국 있고 좁다란 이 책상이어도 충분하다는 걸 안다. 우리에게 소중한 건 소소한 일상이며 다정한 존재일지 모르는데, 나는 주인과 눈이 마주치는 집 앞 카페보다 대형카페에 가는 걸 선호했고 조그마한 연못보다 널찍한 호수가 반가웠고 작은 출판사보다 큰 출판사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렇지만 나의 취향이랄까, 기준이랄까 그런 게 변해간다. 크고 거창한 것보다 자그마한 존재들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최근에 있었던 작다면 작은 사건들.

첫 번째는 소규모 출판사 얘기다. 보름쯤 전에 나는 새 시집을 후배 시인 혼자 운영하는 출판사 ‘타이피스트’를 통해 발간했다. 메이저 출판사와 같은 조건으로 선인세도 받았다.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라는 매력적인 시집 제목도 출판사 대표인 박은정 시인이 지어줬다. 그는 교정과 편집 마케팅 판매 등을 도맡는다. 누구보다 탁월한 감각으로 책임감 있게 일한다. 혼자 사무실 청소, 망가진 프린터 수리, 우편물 발송은 물론이고 꽃다발을 들고 동분서주한다. 샤롯데문학상을 받는 자리에도 제일 먼저 도착했고, 백호임제문학상 젊은 시인상을 받은 조성래 시인을 축하하려고 나주까지 다녀왔다. 나는 타이피스트 사무실에서 참신한 직원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출판시장이 침체기에서 벗어나야 할텐데.

두 번째는 작은 동네책방의 발견이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와 책방 콜라보 행사에 많은 동네책방이 신청했다. 경남 진주와 충남 부여, 전남 순천, 서울과 경기지역 등 다양하다. 나를 초청하고 싶다며 신청해준 10여 군데의 모든 책방으로 가서 북토크나 낭독회를 하고 싶지만, 두세 군데의 책방을 선정해야 한다기에 고심했다. “날도 추운데 지방 가시는 게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시집 한 권이라도 더 독자를 만나게 되면 좋겠지만….” 타이피스트 대표가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을 이어갔다. “책방에서 돈을 드리지는 않는 무료행사잖아요. 가신다면 제가 기차표 정도는 끊어드릴게요.” 신생 1인 출판사에서 시집을 낸 덕분에 나는 취약한 존재들과의 깊은 연대감을 느낀다. 고독하게 간신히 반짝거리는 책방들을 찾아갈 용기를 낸다.

세 번째는 조금 비밀스러운 얘기다. 내가 기다리던 상금이 작년 말에 들어와서 다음 날 친구 집에 갔다. 올해 1월 1일 오전이었다. “지미야, 계좌번호 좀 불러줘. 빌린 돈 이체할게.” 휴대폰 은행 앱을 열며 내가 말했다. 지미는 조용한 데로 잠시 나가자고 했다. 곁에 이웃 아주머니도 계셨으니까. 지미를 따라가며 내 맘은 납작해졌다. ‘이 친구가 왜 이러지? 아무리 형편 어려워도 이자까지 계산할 사람은 아닌데….’ 고등학생 때부터 우리는 친했지만 돈거래는 처음이었다. 나는 책방하며 다른 데 진 빚보다 우선적으로 친구한테 빌린 돈을 갚고 싶었다. 우리는 단둘이 마주 앉았다. “이듬아, 네가 나한테 빌려 간 돈이 700만 원이지? 그럼 500만 원만 돌려줘. 남은 돈으로 올여름 네 방에 에어컨 설치하렴.” 나는 친구 마음이 바뀔세라 속히 송금해줬다. 나보다 키 작고 손도 작은 친구. 나는 그 마음의 둘레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