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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명의 오션 드림] 기회의 바다, 우리네 함장은 어디로 키를 잡을까

이제명 부산대 교수·수소선박기술센터장

  • 이제명 부산대 교수·수소선박기술센터장
  •  |   입력 : 2024-05-02 19:52:30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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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1588년 칼레 해전에서 패전을 겪은 유럽의 맹주 스페인은 해양 패권 다툼에서 영국에 밀려나게 된다. 전쟁의 결과만 놓고 보자면 영리한 전술과 탁월한 지휘력을 통한 영국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 이면에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무리한 북해 회군이나 허술한 해상 보급망 등 복잡했던 이유와 더불어, 영국 해적단의 활약이라는 숨어 있는 ‘신의 한 수’도 있었다. 예측을 통한 대응인지, 즉각적인 임기응변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바다에 대한 이해와 배의 운용에서는 무적함대보다 해적단이 앞섰다. 역사 무대에서 스페인과 영국의 자리바꿈이 일어난 해전의 모습은 이러했고 그 중심에는 바다와 배가 있었다.

1912년 4월 15일 새벽 북대서양. 당대 최고의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해 침몰하면서 1514명이 사망했다. 전쟁을 제외하면, 해상 인명 사고사에서 최악으로 기록되는 참사였다. ‘살려 달라’는 뜻의 프랑스말인 ‘venez m’aider’ 의 끝마디가 익사자들의 혼미한 정신 속에서 반복되었고, 이를 계기로 만국 공통 긴급 조난구호가 ‘메이데이’로 통하게 되는 비극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타이타닉호 침몰은 국제해사기구가 SOLAS(해상에서의 인명안전을 위한 국제조약)를 제정하는 계기가 된다. 오늘날 대양을 항해하는 모든 선박은 SOLAS 규정을 예외 없이 무조건 따라야만 하니, 어찌 보면 글로벌 해양산업에서는 SOLAS가 ‘절대갑’인 셈이다. 참혹한 비극이었지만 해양사에 큰 변화를 만들어 낸 변곡점이 되었고, 이 역시 배와 바다에 의해 만들어진 인류의 역사가 되었다.

얼마 전 넷플릭스 영화 ‘삼체’를 보면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지구를 정복하려는 외계인이 선발대부터 지구로 보냈는데, 본진이 오려면 빛의 속도로 서둘러도 400년이나 더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진이 도착할 즈음엔 이미 지구의 과학이 자신들보다 더 앞서 있을 것이라서, 어쩌면 정복이 힘들지도 모른다는 외계인의 걱정이 담긴 내용이었다. 10만년 가깝게 원시 농경에 머무르던 인류가 과학을 다루기 시작한 지 불과 수백 년 만에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것을 보면 외계 기술을 따라잡는 데는 수십 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 이미 역사를 통해 증명된 사실이니까 그래서 인류의 과학기술 역사 지우기와 기술자 없애기부터 미리 시작해서 400년 후의 침공 준비를 한다는 배경. 영화는 영화로 제쳐 두더라도, 외계인 침공 스토리만 제외한다면 인류 과학기술 발전사와 그 속도는 틀린 말이 아니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유독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생각해 보니 이 만화영화만 제외하고 동서양 공통으로 인류가 우주와 소통하는 방법은 우주‘선(船)’이나 스타‘십(Ship)’, 그러니까 배를 타고 함장이 지휘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바다와 우주는 무의식적으로 닮은꼴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현존하는 기술로 만든 배를 타고는 도달할 수 없는 심해저 탐사 신기록과 새로운 발견들은 항상 그 궤를 같이하고 있으니, 우주와 마찬가지로 바다 역시 미지의 세계임이 틀림없다.

우주항공청 설립이 공식화되고 인력 확보에 들어갔다. 우주나 항공에 관한 연구와 기술개발을 전담해서 총괄하는 새로운 부처라고 하니 기대도 크다. 하지만 바다와 우주를 나란히 놓고 보니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우리의 의식은 같은 흐름을 타고 있는데 다루는 방법은 왜 이렇게 서로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대부분의 우주는 과학기술의 대상이고 대부분의 바다는 행정의 대상일까.

국가상위 정책에 해양이 좀 더 크게 반영되면 좋겠다. 수산, 기후변화 대응, 에너지공급 인프라, 낯선 환경을 다루는 첨단 기술, 어떤 종류이건 각론 차원의 접근은 다를 수 있더라도, 과학기술 적용의 ‘공통’ 플랫폼으로 인식하고 활용하자는 뜻이다. 우주‘선(船)’ 개발사를 거치면서 인류 사회에 적용됐던 과학기술의 폭과 깊이를 생각해 보면, 여전히 우리는 해양이라는 공간을 발견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회의 바다. 바다에서의 기회. ‘바다’라는 단어는 이렇듯 중의적으로 쓰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만큼 바다에는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언어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셀 수 없이 많은 가능성과 기회를 앞에 두고, “10년 안에는 안된다. 30년은 더 걸린다”와 같은 수많은 핑계와 분석들만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시간을 변수로 하는 과학기술 발전 속도는 초월함수를 써도 따라잡기 힘들 만큼 빠르다는 것이다. 단순히 ‘삼체’ 속 외계인의 걱정이 아니다. 변화의 시대, 속도의 시대에, 편견에 함몰된 ‘확증 편향 판단 오류’가 가져다 줄 결과는 치명적이다.

해적단 수장 드레이크에게 훈장까지 줘가며 칼레 해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해군성 장관직까지 내거는 승부수를 둬가며 석탄에서 석유로 군함 연료를 바꾸고, 그래서 1차 세계대전 승리와 함께 석유 시대 황금기를 이끌어 낸 윈스턴 처칠. 파도를 넘어 바다와 함께 역사를 만들어 낸 함장들이다. 22세기 기회의 바다를 앞에 두고 우리네 함장은 어디로 키를 잡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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