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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끼니] 할머니의 곶감

  • 박상현 맛 칼럼니스트
  •  |   입력 : 2024-02-18 18:57:59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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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설이 다가오면 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치열한 두뇌 싸움이 벌어졌다. 할머니는 설이 되면 항상 수정과를 만드셨다. 할머니 수정과의 화룡점정은 곶감이었다. 할머니는 딱딱한 곶감에 차가운 수정과를 끼얹어 미리 불려 두셨다. 그렇게 며칠 불려 둔 곶감을 손님에게 내기 전에 수정과 그릇에 하나씩 담았다. 계피 향 그윽한 단물을 머금은 부드러운 곶감은 내 어린 입맛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곶감의 분은 시간과 자연의 합작품이다.
‘그 맛’을 아는 나로서는 설날 아침에 한두 개 얻어먹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섣달그믐날만 되면 모든 감각을 동원해 수정과에 절인 곶감을 찾았다. 내 의도를 간파한 할머니는 정말 꽁꽁 숨겼다. 넓지도 않은 집구석에 뭐 그리 숨길 곳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번번이 실패했다. 실패의 경험 속에서 나는 굳게 다짐했다. ‘커서 돈을 벌게 되면, 곶감만큼은 원 없이 먹고 말리라!’.

아흔이 훌쩍 넘은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요양병원에 계신다. 아들과 손자를 봐도 오래전 사별한 남편만 떠올릴 뿐 기억마저 온전치 못하신 상태다. 집안은 물론이고 온 동네 잔치음식과 제사음식을 도맡아 하시던 할머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수정과에 절인 곶감도 없고, 그 음식을 만들고 숨겼던 할머니도 없으니 허전하다.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하던 토종 감은 떫은 감이었다. 감이 떫은 이유는 탄닌(tannin) 성분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경험적으로 감이 가진 떫은 맛은 사라지게 하고 단맛을 끌어내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게 바로 곶감이다. 감을 말려 곶감으로 만들면 곶감의 당도는 50~60브릭스까지 상승한다. 기적의 포도로 불리는 샤인머스캣의 당도가 16~18브릭스 정도고, 겨울철 제주에서 생산되는 귤 중에서 아주 높은 것이 13~15브릭스 정도이니 곶감의 당도는 그야말로 꿀과 설탕에 비견될 만큼 달았다.

대신 조건이 있다. 곶감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수분 함량이 20% 내외로 떨어져야 한다. 수분 함량 20% 아래의 곶감은 돌덩어리나 마찬가지다. 시간을 들여 아주 천천히 바람과 햇볕에 말려야 이런 곶감이 나온다.

이렇게 천천히 오래 말린 곶감은 표면에 뽀얀 분이 생긴다. 감이 품고 있던 포도당 성분이 곶감 표면으로 나와 건조된 것이다. 이를 시상(枾霜) 또는 시설(枾雪)이라고 한다. ‘감 표면에 내려앉은 서리 또는 눈’이라는 매우 시적인 표현이다. 바로 이 시상이 감의 단맛을 가두고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 궁중이나 반가에서는 이 시상만 따로 긁어 내 천연 감미료로 쓸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곶감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생산의 효율성과 유통의 안정성을 위해 감을 오래 말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소비자들이 딱딱한 곶감을 싫어한다. 말랑말랑할 정도로 말린 곶감을 냉동 상태로 유통하고 보관한다. 이런 곶감은 아무리 진한 수정과에 절여도 유년 시절 내 입맛을 사로잡았던 그 맛은 나지 않는다.

그래도 곶감은 여전히 맛있다. 무엇보다 죽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은 곶감의 탄생 자체가 극적이다. 수분을 잃은 대신 당도를 얻은 곶감처럼, 올 한해 당신의 삶 역시 비움으로써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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