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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끼니] 명란과 옹기

박상현 맛칼럼니스트

  • 박상현 맛칼럼니스트
  •  |   입력 : 2023-09-24 19:28:32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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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밥반찬은 일본어로 ‘멘타이코(明太子)’라 부르는 명란젓이다. 명란젓이 일본인의 밥반찬이 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다. 조선시대부터 한반도 명태 산업의 본거지는 함경남도 원산이었다. 겨우내 잡은 명태를 손질해 북어와 황태로 건조하고, 명태를 손질하면서 얻은 부산물로는 명란젓 창란젓 아가미젓 등을 담았다. 이렇게 생산된 명태 가공식품은 보부상에 의해 한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유통됐다.
일본 가고시마의 흑초 옹기로, 원형은 조선의 옹기다.
일제 강점기가 되자 명태어장을 독점한 일본인은 명태 가공산업까지 손에 넣는다. 이때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 명란젓. 원산항에서 가공된 명란젓은 경원선과 경의선을 이용해 부산 초량에 닿는다. 그리고 부산-시모노세키 간 정기항로를 통해 일본으로 갔다. 기찻길과 뱃길을 이용한 긴 여정에 명란젓을 담았던 용기는 다름 아닌 옹기. 명란젓을 담은 엄청난 양의 옹기가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음식은 사라지는 것이 숙명이지만 옹기는 어떤 식으로든 일본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낡은 옹기만 보면 출처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랜 의문이 풀린 곳은 일본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현. 제주도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가고시마현은 연중 온화한 기후를 자랑한다. 온화한 기후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겨울에도 기온이 포근해 술 빚기가 어렵다. 이런 한계를 활용해 가고시마현이 술 대신 선택한 것이 식초다. 발효가 과하게 진행될수록 잘 빚어지는 식초는 오히려 따뜻한 기온과 강렬한 햇볕이 득이 된다. 덕분에 가고시마 전통음식에는 유난히 식초가 많이 사용된다.

항아리 속에서 뜨거운 열을 견디며 발효된 현미식초는 시간이 지날수록 검게 변한다. 이를 ‘흑초’라고 한다. 가고시마현에 속한 후쿠야마(福山) 마을은 예로부터 현미로 빚은 흑초로 유명해 ‘흑초마을’로 불린다. 흑초마을 식초 양조장을 가면 수만 개의 항아리 속에서 식초가 익어가고 있다. 그 모습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장관이다. 숨 쉬는 옹기인 항아리는 술은 물론이고 식초를 빚을 때도 더할 나위 없다.

수만 개의 항아리가 놓인 한 편에 낯익은 항아리 몇 개가 올망졸망 모여있었다. 식초 양조장 관계자는 조선의 항아리라고 했다. 어떻게 해서 조선 항아리가 이 먼 가고시마까지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선에서 멘타이코를 담아 온 항아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이어서 다양한 조선 항아리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흑초 발효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항아리를 만들게 됐다고 덧붙였다. 후쿠야마 식초 양조장에서 사용하는 항아리는 일정한 규격이 있다. 형태는 계란형이며 어깨는 각지지 않고 부드럽게 떨어진다.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지만 안정감을 유지하고, 입구는 상대적으로 매우 좁은 편이다. 한반도에서 술을 빚는 용도로 사용하던 항아리와 흡사한데 자세히 보면 경상도 해안지방에서 빚었던 항아리를 쏙 빼닮았다.

음식은 사라져도 어떤 식으로든 교류의 흔적을 남긴다. 이날 나는 옹기에서 각각 5년 10년 20년 숙성된 흑초를 맛봤다. 식초는 옹기에서 오래 묵을수록 신맛은 부드러워지고 단맛과 감칠맛은 강해진다. 10년 숙성된 흑초의 감칠맛에서는 얼핏 명란젓의 감칠맛이 느껴졌다. 물론 내 관능이 아닌 상상력이 빚어낸 맛이다. 맛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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