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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 '기도의 창가에서'] 해인의 서랍에서

이해인 수녀·시인

  • 이해인 수녀·시인
  •  |   입력 : 2023-09-14 19:08:54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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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가 9월의 ‘기도의 창가에서’ 칼럼으로, 산문 대신 본인이 쓴 시를 여러 편 보내왔다. 이해인 수녀 인터넷 카페 ‘민들레영토’를 보니 올가을 들어서도 이해인 수녀의 일상은 여전하다. 많은 신자와 시민, 사회 명사가 가을 인사를 다녀갔고, 문학 행사에도 종종 참여할 예정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텃밭과 꽃밭을 가꾸고, 기도하고 명상하고 시를 쓰는 일상은 이어간다. 이해인 수녀는 “최근 가장 집중하는 일은 곧 나올 시집 ‘햇빛일기’를 마무리하는 일”이라고 했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에 하트 모양의 구름이 떴다. 파란 하늘 흰 구름이 위로를 안긴다.
위로와 치유를 주제로 잡은 이 시집을 엮으면서 독자에게 간절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잘 들어 있는 시편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알려왔다. 독자들이 선사한 별명이 ‘위로 시인’ ‘치유 시인’일 만큼 시민·독자와 친밀한 이해인 수녀의 뜻을 받아들여 이번 칼럼에서는 ‘해인의 서랍’에 쟁여둔 일상 속 시편으로 이어가 본다. 편집자 주



1) 광안리에서

날마다

광안리에 살면서

광안리 광안리

수십 년을 외우다 보니

넓고 편안한

이름뜻 그대로

이제는 내 안에도

큰 바다가 펼쳐지네

바다를 바라보고 살아온

60년의 푸른 세월이

감사하고 감사해서

넘실대는 은총이여

수평선을 바라보며

수평선이 되는

무한한 기쁨이여



원고지에 쓴 글씨.
2) 작은 결심

세상에 머물

생의 길이가

조금씩 더 짧아질수록

나는

마음의 날씨를

밝게 가꾸고

변덕을 피해야겠다

사랑의 폭을

관대함으로

넓혀가야겠다

새롭게 만나는

시간의 결을

조심 조심

맑고 곱게

가꾸어가야겠다

그리고

기도의 지향을

단순하게 정해야겠다

오늘은

이 결심만으로도

충분하고 충분하다



3) 혼자 웃는 날

아무도 몰래

혼자서 가만히

웃어볼 때가 있어요

내가 누구를 진심으로

용서했을 때

본성적으로 화나는 일을

언성 안 높이고

침착하게 참아냈을 때

그리고

먼저 내게 도움을 청하진 않았지만

눈치껏 알아듣고

구체적인 도움으로

어떤 한 사람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살려낸

위로천사의 몫을 했을 때

난 스스로 대견해

성당에서 마당에서

혼자 웃어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작은 기쁨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닌

사랑의 수고임을

오늘도 새롭게 공부하면서!



4) 바다일기

수평선이 보고싶어

바닷가에 나가

그냥

바다!라고

가만히 말했을 뿐인데

가슴이 뛰다 못해

눈물이 나네

달려오는 파도에게

그냥

파도야! 라고 불렀을 뿐인데

또 눈물이 나네

집에 돌아와서

왜 그럴까 생각하다

잠이 들었지

꿈결에 흘리는

나의 혼잣말

산다는 게 언제나

끝없는 그리움이어서

그러나 실은

언젠가는 꼭

끝나게 될 그리움이어서

그래서 눈물이 난 것이라고



5) 내 몸의 사계절

친구야 내 몸에도 사계절이 있단다

항상 설레이는 시인으로 살고 싶은

나의 마음과 찬미를 노래하는 나의 입은

봄인 것 같고

항상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은

나의 마음과 가슴은 여름인 것 같고

항상 단풍빛의 그리움을 안고 사는

나의 마음과

고독이 출렁이는 나의 눈은 가을인 것 같고

항상 참을성 있게 비워두고 싶은

나의 마음과

차디찬 손은 겨울인 것 같고

이렇게 말해도 말이 된는 걸까?



6)코로나 격리 후기

양성입니다!

듣는 순간부터

내 일상의 기쁨은

길을 잃었지

가만히 있는데

옷이 젖을 만큼 진땀이 나고

조금씩 열이 오르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네

평소엔 잘 먹던 밥과 반찬도

통 당기질 않고

흥미가 없어지고

약을 먹는 종류가 많아

괜시리 우울해지네

그래도 고마운 건

격리 중에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것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우두커니의 시간이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준 것

그래서 코로나도 이제는 그냥

친구라고 불러주기로 마음먹으니

편안하구나

확진자이니 접촉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시키고

다들 나를 피해 다니니

조금은 서운하고 외롭기도 했지만

소외감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되니

괜찮았다고 인생노트에 적었지

외딴 공간에 홀로 격리된 후

다시 마주하는

내 일상의 장소와 소임을

감동하며 받아안는

눈부신 기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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