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동네 여자친구 이름이 ‘차남’이었다. 둘째 아들이란 뜻이다.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라 사랑받았으나 둘째인 친구는 “또 딸이냐”며 아들 역할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집안 어르신들이 차남이라고 불렀다. 안타깝게도 셋째도 딸이었고 친구 동생은 어린 시절 ‘섭섭이’로 불렸다. 1970~80년대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가족계획 운동이 진행되면서 남아 선호 현상이 두드러졌다. 당시 아들을 바라는 집에서 딸이 태어나면 버려지거나 입양 보내는 일이 잦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여아에 대한 낙태가 성행했다. 지금은 이런 남아 선호 사상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 ‘영아살해’가 사회적 충격을 주고 있다. 보육원에서 일하던 간호사 이다정 씨의 제보로 시작된 출생 미신고 영아 찾기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 간호사는 몇 년 전 경북 안동에서 친모가 신생아를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숨진 아기가 B형 간염 1차 예방접종 기록은 있는데 출생신고가 안 된 것을 알게 됐다. 전국적으로 출생아 접종 기록보다 출생신고 수가 적은 것을 알고는 출생 미신고 영아가 많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변호사 2명과 함께 프로젝트 팀 ‘사회적 부모’를 만들었다. 이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감사원의 보건복지부 감사를 끌어냈다.
통상 의료기관에서 태어난 신생아는 12시간 안에 B형 간염 예방접종 기록이 등록된다. 이때 출생신고 전이라도 임시번호를 부여받는다. 보건복지부 조사 결과,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 동안 출생신고는 안 돼 있는데 임시번호 상에만 존재하는 아이들이 2123명에 달한다. 이들 중 11.7%인 249명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자체 조사를 통해 222명이, 경찰 수사를 통해 27명이 각각 확인됐다. 태어난 아이 중 매년 수십명이 삶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생존이 확인된 경우는 1025명에 불과했다. 자료를 찾을 수 없는 2015년 전 사라진 유령아이는 얼마나 많을지 알 수 없다. 수사로 드러나는 범죄 행태는 끔찍하다. 경기도 수원에서는 아이를 출산한 후 곧바로 살해해 냉장고에 시신을 넣어둔 30대 여성이 붙잡혔다. 광주에서는 생후 6일 된 딸을 방치해 숨지게 한 뒤 쓰레기 수거함에 버린 30대 여성이 적발됐다.
우리 사회에 이런 유령같은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정부가 몰랐을까 의심스럽다. 영유아를 상대로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개인이 가장 큰 문제지만 이런 일을 방치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병원이 부여하는 임시번호와 주민등록번호를 대조하면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들의 숫자를 알 수 있으나 하지 않았다. 그동안 병원도 행정비용과 책임 부담이 커진다며 출생통보제를 반대했다. 정치권도 책임이 적지 않다. 사회적 파장이 커지자 정치권은 의료 기관이 신생아의 출생 정보를 지자체에 의무적으로 알리는 출생통보제 법안을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또 영아가 범죄로 인해 살해될 경우 처벌이 무거운 일반살인죄를 적용할 방침이다.
물론 출생통보제가 유령아이 발생을 온전히 막을 방법은 아니다. 출산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않는 10대 청소년과 미혼모 성폭력피해자 등은 병원 밖 출산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병원 기록이 없는 아이들은 불법 입양과 유기 등 더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대안으로 부모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출산하면 국가가 아이를 지켜주는 보호출산제 도입이 거론되고 있다. 이는 양육 포기와 입양 아동 양산을 부추기고 아이가 훗날 친부모를 찾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아동이 성인으로 성장한 후 자신의 출생 관련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보완책을 정부와 정치권에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문득 영아살해 대책을 속전속결로 추진하는 정부와 정치권을 보면서 원인은 제대로 찾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앞으론 영아살해 땐 최대 사형까지 가능해졌는데 과연 아이를 죽인 엄마를 엄벌한다고 영아살해가 없어질 지 의문이다. 아이를 버리는 주요 원인으로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 경제적 어려움이 꼽힌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아살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복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따라서 사회적 위기에 처한 미혼모와 싱글맘 등 지원이 시급하다. 독일은 1300여 곳의 임신갈등지원센터를 운영해 출산을 고민하는 미혼모에게 상담과 경제적 지원을 한다. 프랑스는 2006년 혼외출산 구별 규정을 없애 아기를 낳으면 각종 혜택을 준다. 우리나라도 임신부터 육아 등 통합적인 사회적 지원 시스템을 갖춰야 할 때다. 정부가 지난 16년간 쏟아 부은 저출산 예산 280조 원 중 일부라도 이들에게 썼다면 매년 수십명의 아이가 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출산 장려도 좋지만 이미 태어난 소중한 생명을 지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은정 논설위원
)
